민주주의를 염원했던 충청권 최초 학생운동
4·19혁명의 징검다리 역할

학원에 자유를 달라며 외치며 걷는 대전고 학생들 /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행진하는 대전고 학생들

3⋅8 민주의거가 있던 1960년은 집권당이었던 자유당 정권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선거부정이 만연한 시기였다.

그해 3월 15일 치러지는 4·5대 정·부통령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연임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야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급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고령(86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有故) 시 야당에 정권이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고등학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였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민주주의를 벗어나는 사태가 일어났다.

특히, 대구 2·28 민주의거가 발생한 뒤 모든 학생을 일요일에 강제 등교를 시키고, 사실상 자유당의 홍보지였던 서울신문을 강제로 구독하게 했다.

학생들은 학원 내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고자 시위를 통해 학무국장(교육감)에게 결의문을 전달하고,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3·8 민주의거가 발생하기까지

대전고등학교 3·8민주의거 유공자들이 촬영된 기념사진(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박장언 유공자) /
대전고등학교 3·8민주의거 유공자들이 촬영된 기념사진(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박장언 유공자)

당시 새 학기를 4월에 시작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학교에는 1, 2학년만 남아있었다. 3학년은 2월 중에 졸업식을 했기 때문이다.

대전고등학교는 ‘학도호국단’이 앞장서 시위를 준비했다. 이들은 시위 전날 시내에 모여 시위를 계획하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이들은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연설회에 맞춰 시위를 전개하기로 했다.

 


3·8민주의거, 그날의 과정

1960년 3월 8일 오후 대전고등학교 1·2학년 재학생 시위 코스 / 재배포 금지
1960년 3월 8일 오후 대전고등학교 1·2학년 재학생 시위 코스 / 최우영 3.8민주의거 유공자 제공

시위 당일, 비밀이 누설돼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오전 내내 학교 맞은편 교장관사에 연금됐다. 이들이 점심식사 후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교실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됐다.

재학생 모두는 교문을 박차고 담장을 넘어 큰길로 뛰쳐나와 대오를 갖추고 구호를 외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견한다”, “서울신문 강제구독을 배격한다”,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생동태 감시를 중단하라”

시위대 앞으로 진압경찰의 백색 지프차가 돌진해오자, 학생들은 대오를 풀고 양 갈래로 갈라졌다. 경찰들이 경찰봉과 카빈소총의 개머리판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공설운동장 입구에 이르자 시위대는 경찰들이 친 방어벽에 부딪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인동시장을, 일부는 대흥교 밑으로 중앙시장을 거쳐 대전역 광장으로 향했다.

역전 왕생백화점 부근에 도착했으나, 경찰들은 목척교에서 도청방향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최후저지선을 치고 포진하고 있었다.

결국 시위대는 중교와 선화교로 우회해 학교로 돌아와 농구장에 모여 연좌농성을 계속했다. 당시 경찰의 진압에 끌려간 학우 80여 명과 조남호, 금종철 선생이 구금돼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 교장, 경찰서장이 시위장소를 찾아와 끌고 간 선생님과 학생들을 선처해주기로 약속을 받고 해산했다. 오후 9시경 연행됐던 학우들이 석방됐고 주동학생들은 자정을 넘겨 귀가했다.

다음 날부터는 방과 후 매일같이 경찰서로 소환해 배후를 밝히라고 협박했다. 문제는 배후라고 할 게 없었다.

 

대전 공설운동장 앞에서 충돌한 경찰과 학생 /
대전 공설운동장 앞에서 충돌한 경찰과 학생

학생시위 확산...3·10의거 발생

1960년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1·2학년 재학생 시위 경로 /
1960년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1·2학년 재학생 시위 경로 / 최우영 3.8민주의거 유공자 제공

경찰은 초비상 경계태세에 돌입했으며, 각 학교는 돌연 기말시험을 예정보다 앞당겨 학생들의 관심을 분산시켰다.

또, 경찰은 연쇄적인 연합시위를 우려한 나머지 각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 또는 예정자들의 주소를 입수하여 9일 밤부터 일제히 연행해 회유하고 협박했다.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1, 2학년 재학생 600여 명은 조회시간을 틈타 시위에 돌입했다. 대전경찰서에 학우들이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구속된 학우들의 석방을 위해 “자유수호, 민주사수,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대전우체국과 목척교 인근에서 경찰과 크게 충돌했다. 일부는 대전경찰서까지 진출했으며, 보문고와 대전고를 지나며 합세를 독려하기도 했다.

 


'3·8민주의거' 가장 큰 규모의 준비·체계 잡힌 시위였다

동아일보 3월 9일자 보도
동아일보 3월 9일자 보도

이후 조·석간의 사회면에 대서특필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가장 큰 규모의 준비와 체계까지 잡힌 최초의 시위였기 때문이다.

3·10의거는 같은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학생시위가 확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국내 최초의 기록이 됐다. 이후 4·19혁명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았다.

대구 2·28, 대전 3·8, 마산 3·15에 이어 4·19 혁명까지 모두 고교생에 의해 시작됐다는 특징이 있다. 기반에는 대한민국 민주헌법에 대한 교육이 있었으며 결국 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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