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새벽에 문득 깨어 듣는 봄비 소리 / 굵게 시작해 성글어진다. / 또다시 굵어지겠지. / 추위에 잔뜩 움츠리고 날거나 기던 것들 / 뿌리 붙잡고 심동三冬을 견딘 나무와 풀 들 / 꼬았던 몸들이 풀리겠지. / 오랜 심통이 풀려 / 마음이 헐렁해진 사람도 있겠지. // 꽃들이 작심하고 무대에 오르고 / 나비와 벌 들이 정신없이 오가고 / 다시 보면 꽃자리에 / 크고 작은 열매들이 정성껏 앉혀진다. / 구름의 옷자락 점점 짧아지고 / 나무들이 단풍에 올랐다가 내려오고 / 잠깐 한눈팔다 보면 / 열매 있던 곳이 텅 비었다! / 빗소리가 다시 굵어졌다 멎는다. / 꽃, 열매, 텅 빔, 이 세 자리를 / 하나같이 손보는 시간의 손길, / 어느 한둘만 보고 삶을 꿰찼다 할 수 있겠는가? - 황동규「시간의 손길 – 봄비 소리를 들으며」전문

어떻게 과세過歲는 잘 하셨는지요? 직계가족이라도 4인 이상 모이면 안 된다는 기막힌 코로나 19시대의 새해- 신축년의 설도 지나갔습니다. 설빔 차림새의 아이들과 선물 보따리 든 귀성객 들꾀던 서울역도, 주차장으로 변하는 고속도로도, 성묫길에 숫눈 쌓인 산밭 지나가는 후손들도... 그 낯익은 풍경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일가 종친회를 다른 말로 화수회花樹會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꽃이 피듯 언젠가는 피붙이들 모두 함께 환한 웃음꽃 피울 시간이 분명 오겠지요. 설 연휴의 주말에는 이슬비보다 좀 굵은 비가 오락가락해 처연함이 몽클 치솟았습니다.

가고 싶고, 보고 싶어도 눈과 손, 발의 길들이 묶여버린 억울하고, 서글픈 심정을 가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그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리 황잡한 세상이 되었는지 알 길 없기에 울분만 쌓였던 지난날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새봄이 시작되었고, 마음 다잡고 심전心田- 이제 본격적으로 저마다의 밭을 일구어야 할 때입니다. 이미 흰 소의 등에 올라탔는데 이랑 낼 소를 찾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미물들이 기지개를 켜고, 초목들도 물기운 자아올리며 봄꽃 내고, 새싹 틔우기 위해 분주해졌습니다. 사람들 또한 겨우내 마음먹고, 품은 일 해보자 벼르는 신춘입니다. 물론 언 땅과 강물을 녹이는 일 역시 물에 맡기는 게 자연의 이법理法이겠지요. 사람들 사서 부린다고 눈발이 그치고, 봄비가 내릴 턱이 없을 터. 천망회회天網恢恢- 대자연의 촘촘한 그물코와 닿지 않는 곳 없는 풀무질은 24절기를 지켜 천지 기운을 순환시켜왔습니다. 그 덕에 꽃이 피고, 벌과 나비들이 오가며, 열매를 맺고, 수확하게 되는 것이지요.

황동규(1938- ) 노시인은 사람들이 익히 보았던 사계절의 변화를“꽃, 열매, 텅 빔”세 가지 시어로 치환했습니다. 그러면서 되묻습니다. 이녁들은 일습 중에 어느 것을 가장 중시하는가? 어느 것 하나라도 빠뜨리면 철부지라면서 말입니다. 새해 원단에‘삶의 한 자락을 꿰찬’웅숭깊은 시를 감상하는 것은 더욱 풍성한 수확의 한 해를 설계하며 큰 영감을 얻는 일입니다. 우주 나무에 한 번 피었다 지는 꽃- 짜장 사람꽃이 세상 제일 예쁜 꽃이라 했는데 오래된 미래의 꽃을 둘러싼 알짬은 이렇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도 근본이 없고 죽음에 들어간다 해도 구멍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상은 있어도 그 근원을 찾을 곳이 없으며 영겁의 시간만 있고 시작과 끝은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생겨난 것만 있고 구멍이 없는 것이 실상이다. 실상은 있으나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든 곳에 있는 것이 우宇이며, 긴 시간은 있으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주宙이다. -『장자』잡편「경상초庚桑楚」12

하늘과 땅, 사람을 삼재三在라 부르고, 시간과 공간에 인간을 더해 삼간三間이라고 부릅니다.『주역』은‘시時, 공空’이 아닌‘시, 위位’로 표현하는데‘위’는 인간을 위시한 모든 존재 곧‘물物’이 놓인 공간을 말합니다. 이는‘물’이 없으면 시간과 공간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전제이고, 똑같은 시간은 있으나 똑같은 위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절대적 시간의 가역성으로 다른 공간의 그‘위’를 확보해야 존재한다는 논리입니다. 황동규시인은 이런 인식의 틀에서‘꽃이 핀, 그 자리에 열매 맺고, 회두리에 텅 비운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한자‘춘하추동’을 순우리말로 새기면‘볼열갈결’인데 지극히 온당하다 여겨왔습니다. 새봄에 새롭게‘볼’것이고, 여름에 열매가‘열’리고, 가을이면‘갈’차비하고, 겨울이면 한 해를‘결’하는 매조지입니다. 또한 1년의 순환은 곧 물水기운의 변화인데 봄비, 장맛비, 서리와 이슬, 눈이 번갈아 내리는 현상입니다. 그렇듯 일정한‘시’에 감응하는‘위’의 동식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는 것이지요.

이름이 있음이 만물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항상‘어떤 것도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음 무욕無慾’에서는 그것으로‘사물이 시작되는 미묘함妙’을 살펴서 헤아리고, 항상‘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유욕有慾’에서는 그것으로‘사물이 되돌아가서 끝나게 되는 종결점 요徼’를 살펴서 헤아린다. 이 두 가지는 나온 것은 같은데 이름을 다르게 붙였으니, 그것을 함께 아득함 현玄이라 이른다. 그러니 아득하고 또 아득함은 온갖 미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다. - 노자『도덕경道德經』제 1장

이‘중묘지문’을 앞의「경상초」에서는 이렇게 석명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있고 나가고 들어옴이 있다. 들어오고 나가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을 바로 천문天門이라 한다. 천문은 무無 자체이며 만물은 이 무에서 생겨난다. 모든 유有는 유가 아니고 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무이며, 유는 하나도 없다!

이 언술은 현실적 공간의‘유, 위’를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를 찾아 새기며, 알차게 살라는 긍정의 권면입니다. 기실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자본화, 도시화의 근.현대 노정에서 무엇보다‘잘 살아 보세’가 최대의 과제였습니다. 보릿고개를 어렵사리 넘긴 민주화시대에는‘나도 말 좀 하자’주먹 쥐고 대거리했지요. 이제‘잘 놀아 보세’의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천박과 대박, 급박한 배금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계층과 세대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다층적 폭력 문제가 상존하는 위험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노시인은‘삶의 한 자락을 꿰찬’감회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감각이 시들어도 / 아픔은 방금 뱀 입에 물린 개구리같이 생생하다. / 아픔을 노래하자 * 돌이켜보는 청춘은 늘 찡하다. / 삶에서 추억이 제일 더디 가는가? * 선사들의 선문답을 읽을 때 / 문답하는 자들의 삶이 뚜렷하다. / 그런 삶 없이 씌여지는 선시禪詩엔 / 말을 뛰어넘으라는 말만 가득하다. * 사랑과 죽음, 이 두 가지는 / AI가 앞으로 계속 체득하려 들 것이다. / 그러나 AI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싶어 할 것은 / 우리가‘비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나. - 황동규「일곱 개의 단편斷篇」부분

황시인은 시구대로‘임플란트 하고, 황반변성 안구주사를 맞고’,‘운전면허증’을 반납하고 후배교수의 차를 빌어‘두물머리 드라이브’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웃과 사회에 대한 심정적‘아픔’을 위무하자 권고하십니다. 해서‘말을 뛰어넘으라는 말만’가득한 세상에 삶 자체가 말이고, 말 자체가 삶인 자세를 진정 추구하라 일깨우십니다. 최후의 인공지능마저 갖지 못하는 비밀스런‘사랑과 죽음’이 사람됨의 근본적인 가치라고 일침을 가하시면서 말입니다.

봄 저녁 하늘에서 문득 들려오는 / 목이 조금 쉰, 귀에 익은 쇠기러기 소리, / 일부런 듯 오래 잊고 살았구나. / 만난 김에 물어보자. / ‘이번 가을에 다시 올 거지? / 혼자 올 건가, / 자식들 먼저 보내고 느지막이 올 건가? / 이번 여정, 좋았는가 나빴는가?’/ 귀에 날아온 그의 말: / ‘다 내려놓고 가네. /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겠지. / 내 자리 비워놓지 말게.’- 황동규「쇠기러기 소리」전문

마을 어귀의 높은 솟대- 그 끝에 앉은 새가 바로 겨울철새인 오리나 쇠기러기인데 3월이면 남쪽에서 떠납니다. 황시인은 무리지어 먼 여정에 오르는 그 새들 붙잡고 당부합니다.“그대들 떠나면 들이나 강녘이 텅 비어 허전할 텐데 가을에 다시 오시게나, 꼭!”이번에는 스스로 다짐하듯 답변이 뻔한 질문을 합니다.“이번 여정이 진정 마음에 들었는가?”

선문답하는 자들의 삶이 뚜렷하다 말하지 않으셨는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죄다 잊고, 묻고 떠나는 마당인데 무어 그리 대수인가? 내 자리 그 누군가 대신 차지할 터. 텅 빈 그 자리 지키는 수고는 아예 마시게나. 그렇습니다. 쇠기러기들은 한때, 여기나 거기, 그때가 다르다 여기지 않지요, 그저, 그냥‘시간의 손길’에 내맡길 뿐. 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의 묘비명은 이렇습니다.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단지 1931년부터 1990년 사이에 이 행성 지구를 방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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