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성탄절 예배는 물론 제야의 타종행사에도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고, 감염된 고인故人은 염습도 없이 ‘화장 후 장례’ 치르는 기막히고, 가혹했던 2020년- 비말, 팬데믹, 코로나 3법, PCR양성검사, 선별진료소, 지표환자, 음압병상, 자가와 코호트 격리, 재난지원금, 언택트, 뉴 노멀... 전대미문의 용어가 난무하면서 울고불고, 탄식과 신음의 ‘호모 마스쿠스Homo Maskus’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새해 원단에 큰 복 받으시고, 청복과 열복 누리며 소원 성취의 해 나시길 비손합니다.

그게 이렇습니다. 태양太陽 그 해는 자고이래로 뜨거나, 지지 않는 붙박이입니다. 지구가 스스로 돌면서 밤낮을, 해를 크게 한 번 선회해서 1년을 만들어왔지요. 물론 월月 그 달이 대괴를 한 번 돌면 한 달입니다. 그 해와 달에 오행五行: 金木水火土을 합해 1주일이 되는 것이고요. 별星요? 그것에 대해서는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의 사람들 수효만큼 별이 명멸한다 했으니 저마다의 그것 찾아볼 일이니까요. 묶어보면 해와 달, 별- 우주의 절대 광원인 이 세 가지 빛을 보면 사는 것이요, 못 보면 죽는 것입니다. 그 이법을 윤동주(1917. 12. 30.-1945. 2. 16.) 시인이 일러주었습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 별이 아슬히 멀듯이, // 어머님, / 그리고 당신은 북간도에 계십니다.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 내 이름자를 써 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 따는 밤을 세워 우는 버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 윤동주「별헤는 밤」부분

해환尹海煥이 1941년 2월 5일에 쓴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명시- 그는 이듬해 도쿄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는데 여름방학에 고향 북간도의 명동촌을 찾았습니다. 시구처럼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과 패, /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을’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타국에서 가없이 부르며 그리던 생모와 상면하고, 회포를 풀었겠지요... 그해 동주는 도시샤대학으로 학적을 옮겼는데 이듬해 7월- 귀향 직전에 일본 경찰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었고,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15자의 전보 한 통이 일제강점기에 스물아홉 해를 산 윤시인의 마지막 기별이었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시편들은 어머니와 가족, 조국의 하늘에 영원히 반짝이는 ‘별’이 되었습니다. 저 네덜란드의 호이징가는『중세의 가을』(1919)에서 이렇게 언표했습니다. ”사실 매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 주로 불행한 일들이 역사로 남는 것이다.“

베를린대학 한병철교수 역시『피로사회』(2010)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매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그러면서 지난 20세기는 ‘면역학적 시대’라고 규정하고, 본질은 ‘공격과 방어’인데 맹목성이 짙고,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라고 주창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착취의 현대적 피로사회’를 논하는 에세가 작금의 21세기 ‘코로나 19’에 대한 통찰의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전세계적으로 판매가 급증한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장편소설『페스트』(1947년)는 이렇게 매조지 됩니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가 남기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 면역학적 싸움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고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전의 일반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넘어 전해지는 인류의 지혜- 여기에서 이탈리아 살바토레 세티스(1941- )의『고전의 미래』가 크게 유용합니다. 저자는 문학ㆍ미술ㆍ건축ㆍ음악 등 거의 모든 문화현상에 대한 '고전'의 드러남을 통해 현대사회에서의 '고전'이 지닌 가치의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장에서 기원전 2세기 로마 시인 루킬리우스의 언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 시민이 종종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전쟁에서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았다”

지극히 온당한 인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과 가족, 사회와 국가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이겨내고, 마침내 전한 거룩한 승전보의 총합, 산물이 고전입니다. 이런 까닭에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문인 손보선(1874-1924)은 “새로운 눈으로 옛 책을 보면 옛 책이 모두 새로운 책으로 보인다. 반대로 낡은 눈으로 새 책을 보면 새 책 역시 낡은 책이 된다.” 결국 고전을 당대의 고난을 이겨내는 ‘전술과 병법서’로 읽어내는 독자들의 예지가 집단 지성을 심화시키며, 역사를 발전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릇 정월 초하루는 외면에 국한해 본다면 비록 해가 새롭고, 달이 새롭고, 날이 새롭지만 풍습은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다. 단지 부모님이 건강하고 편안하며, 형제가 화평하고 기뻐하면서 색동옷을 입고 서로 어울려 춤추며, 밝은 등잔과 따뜻한 술잔을 나누는 연회 앞에서 오래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가 유독 즐겁겠지만 타향에서 오랫동안 나그네처럼 지내는 사람과, 새로운 것을 느끼고 옛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월 초하루보다 더 슬픈 날은 없다. 나와 같은 사람은 슬픈 감정에 잠겨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한다. - 이덕무 산문집『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1』「정월 초하루의 깨달음」부분

서자 신분으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 가난한 생활에 시달렸지만 진정 책을 사랑한 조선 영.정조시대의 이덕무(1741-1793). 명나라 동기창(1555-1636)의 독서만권讀書萬卷 행만리로行萬里路 그 화신인 아정- 승두세자蠅頭細疵: 파리만큼 작은 글씨로 베껴가며 순수한 학문을 탁마해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과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중국과 일본에 문명을 떨친 동방일사. 정조는 그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했고, 별세하자 개인적인 내탕금 5백냥을 하사해 유고를 간행케 하명했죠. 청장관의 조선적, 실학적, 독창적 글쓰기는 훗날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는 천리마를 타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가만히 상상해 본다. 만약 밤에 천리마를 타고 내달리며 북두성을 바라본다면 마치 말쑥한 띠처럼 기다랗게 보일 것이다. -이덕무 산문집『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2』「천리마와 북두성」전문

18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살았지만 이덕무와 윤동주는 저 말라르메가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허무를 보고 난 뒤에 본 아름다움’ 그 한뉘가 아니었을까요. 절대미의 세계는 끝없는 차가움인데 영원한 실재로서의 보편적 본질만이 존재하는 곳, 반짝이는 순수한 별들의 나라 그 ‘순수한 빙하지대’에 도달한 현자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만큼 자신이 쓴 책으로보다 쓰지 않은 책으로 더 유명한 작가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세계는 하나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그것은 “우주에 대해서, 우주에 의해 작성되는 책“이라고 석명했습니다.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그 ‘책’의 편린들이 윤동주와 이덕무의 시문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나는 곳곳한 나뭇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武士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윤동주「달을 쏘다」부분

적토마를 타고 북두칠성을 향해 은하수를 헤치며 달리는 이덕무와 달을 행해 온몸을 투사하는 윤동주- 육체적 출신 성분이나 사상적 시대적 고난을 웅혼하게 박찬 그 기백에 위무 받고 희망을 얻게 됩니다. 새해 첫 ‘밑줄 이야기’를 끝내려 하는데 찰스 디킨스(1812-1870)가 슬그머니 장편소설『두 도시 이야기』(1859)의 첫 문단을 가르키네요.

최고의 세월이요, 또한 최악의 세월이었다. 지혜와 우둔의 시대요. 광명과 암흑의 계절이요,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들 앞에는 온갖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또한 아무것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모두가 천국으로 곧장 연결된 것들이었으며, 지옥으로 곧장 떨어질 것들이었다.

몸과 마음 부리며 살아내는 사람 한살이! 희망이 없는 것은 상처가 없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고전의 산맥에는 시대마다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면서, 희망을 품었는지 갱구와 갱도를 숨겨놓고 있습니다. 천문은 노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지만 인문은 파헤치는 수고만큼 얻어지는 광물이 아닌가 합니다. 부디 새해에 더욱 건승, 건필하시길 기원하며, 제가 경구 삼아 암송하는 글귀를 선사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다. 그러나 유한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에 둘러싸여 있다. 삶의 목적은 그 무한을 되도록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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