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연종年終! 해마다 이맘때면 세월과 나이, 시간 같은 낱말이 떠오르고, 이런저런 회한에 빠지게 됩니다. 올해는 코로나 19의 지속적인 확산과 역대급 긴 장마에 여야 패거리의 대립, 법무부와 검찰의 반목, 부동산값 폭등 따위에 시달린 1년이었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알아서들 집콕, 방콕하는데 왜 그리 말言들이 말馬처럼 내달리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불급설駟不及舌- 행정명령대로 정해진 수의 교인이 모여야만 하는 성탄절 예배, 제야의 타종식마저 취소해야만 하는 기막힌 세밑입니다.

짜장 사람들끼리 만나서는 안 되는 그런 희한, 기이, 가혹한 나날들이 이어진 위험, 불안, 피로한 사회- 저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작은 일생’이라고 규정했는데 그것에 기대면 1년은 조금 더 큰 일생이겠지요. 이녁들의 경자년 365일은 정녕 어떠셨는지요? 물론 일찍이 요한 호이징가가『중세의 가을』에서 규정했지만 말입니다. “사실 매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 주로 불행한 일이 역사로 남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하다 / 마스크 쓰고 산책 나갔다. /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 / 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 / 그리고 아니 벌써 라일락! /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 / 밟을 뻔했다, / 하나는 노랑 하나는 연분홍, 쬐끄만 풀꽃 둘이 / 시멘트 블록 터진 틈 비지고 나와 / 산들산들 피어 있었다. / 둘 다 낯이 익다. / 노랑은 민들레, 그런데 연분홍은 무슨 꽃? / 세상 사는 일이 대개 그렇듯 /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른다. / 알든 모르든 둘 다 간질간질 예쁘다. / 어쩌다 지구 사람들 모두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 서로서로 거리 두는 괴물들이 되더라도 / 아는 풀 모르는 풀이 함께 시멘트 터진 틈 비집고 나와 / 거리 두지 않고 꽃 피우는 지구는 역시 살고픈 곳! / 그 지구의 얼굴을 밟을 뻔했다. - 황동규「밟을 뻔했다」전문

가을은 북쪽 산부터 내려오고, 봄은 남녘 바다와 땅부터 올라오는 법이죠. 북위 30도 34분 21초 그 중국 우한의 2019년 12월- 제주도보다 더 아래인데 어찌 바이러스 동장군을 물리쳤다는 승전보 그 화신花信을 전하지 못한 것인지. 장강이 우한을 가로질러 흐른다는데 진나라 왕을 암살하러 떠난 자객 형가荊軻처럼 진압군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 것인지요. 마침내 지구촌은 까뮈(1913-1960)의 장편소설『페스트』(1947)의 ‘오랑’, 주제 사라마구(1922-2010)의『눈먼 자들의 도시』(1995)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판국에 남 탓 제 탓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콕(서재에서 칩거)하던 한국의 원로 시인 한 분이 산책에 나섭니다. 잎보다 꽃이 먼저인 봄꽃도 이울고, 라일락이 피기 시작한 2020년 5월의 초여름- 불현듯 이름 모를 풀꽃을 응시하며 대괴大塊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고대 중국 명가 혜시의 권면이 그렇습니다. “범애만물汎愛萬物 천지일체야天地一體也: 두루 만물을 사랑하라 하늘과 땅 사이 그 만물이 하나다!” 수평선과 지평선을 망각한 채 죄다, 모두를 단절과 구획의 도시적 감정으로 살아서 자연이 대노했다고 수근거리는데 이미 데이비드 윌리스 웰스는「2050년 거주불능 지구」라는 무시무시한 글을 발표했었죠. “지구의 6번째 대멸종인 ‘인류세 멸종’이 코앞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지난 10월 26일 여든세 살의 황동규시인이 4년 만에 신작 시집을 내놓았습니다. 꼭 10번째 시집으로 19살에 등단했으니 60여 년을 훌쩍 넘기며 시업詩業을 이어오신 셈입니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 출생으로 8.15 광복 후 월남, 6.25 전쟁의 피난민, 산업화와 도시화, 민주화의 한 국민이었던 시인. 그의 시편들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바로 한국사회의 시사詩史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시사는 역사를 소재로 시를 썼다는 것이 아니라 ‘시로 쓴 역사’라는 뜻이죠. 두보가「안록산의 난」을 몸소 겪으며 백성들의 고난을 시로 남겼듯이 말입니다.

한창때 그대의 시는 / 그대의 앞길 밝혀주던 횃불이었어. /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없던 길 내고 / 그대를 가게 했지. 그대가 길이었어. // 60년이 바람처럼 오고 갔다. / 이제 그대의 눈 어둑어둑, / 도로 표지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 표지판들이 / 일 없인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게끔 되었어. // 이제 그대의 시는 안개에 갇혀 출항 못 하는 /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 / 그래도 어둠보단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 / 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 어느 배에선가 나도! 하고 불이 하나 켜진다. 반갑다. / 끄지 마시라. - 황동규「불빛 한 점」전문

「즐거운 편지」,「삼남에 내리는 눈」,「초여름의 꿈」...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1915-2000)만큼 유명한 그의 아들 황동규의 명시를 잘 아실 터. 우리는 그 ‘불빛’을 통해 고해라 부르는 바닷길의 노역과 시름을 이겨내고, 다시 돛을 드높이고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이제 그 선장은 항구에 정박해 황반변성으로「안구주사를 맞고」, “10년 동거한 다섯 번째 차를 처분하고”(「차와 헤어지고 열흘」) 우울증을 앓고, “보청기 끼고 소리 안 나게 문을 여닫곤 하는”(「이 겨울 한밤」) 폐선 직전이지만 여전히 밝고, 씩씩하고 명랑한 마음을 전해 주십니다.

그래 웃자. / 오늘은 날이 갰고 우린 만났다 / 어쩌다 저세상 가서도 서로 연락이 닿으면 / 오늘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뜬 날 만나자 –「오늘은 날이 갰다」부분

그래, 고맙다, 지구, 커다랗고 둥근 곳, /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에게도 / 서성거릴 시간 넉넉히 준다. / 허나 눈앞에 반딧불이 하나 갈 데 없이 돈다면 / 지금이 얼마나 더 지금다울까. -「손 놓기 3」부분

태어날 때 거꾸로 매달려 / 엉덩이 맞고 시작한 눈물은 / 대충 말려 갖고 가겠네, / 눈물 자국은, 글쎄 / 제풀에 희미해지도록 놔두시게 –「맨땅」부분

코로나바이러스 땜에 내내 집콕, / 읽은 신문 다시 읽고 / 무작위로 오디오 틀어놓고 뒹굴다가 / 오늘 오후, 반가운 후배 하나가 일부러 차를 끌고 와 / 두물머리로 드라이브 나갔다. ... 때가 어느 땐데 / 이런 자리 마련해준 사람과 날씨, 고맙다. / 어디서 흘러오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게 된 나 / 날 가운데 / 이 하루, / 무지개 같다. - 「두물머리 드라이브- 2020년 3월 16일, 이숭원에게」부분

황동규시인의 신작시집『오늘 하루만이라도』에는 그 흔한 해설이나 평론이 실려있지 않습니다. 하기야 그 어떤 문사가 원로 시인의 ‘항해’에 이렇다 저렇다 언설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주석처럼 자신의 산문 두 편을 실어 항로를 밝혔는데 바로 ‘극劇서정시’입니다. “처음과 끝의 정황이 같은” 선배 시인들과는 ‘다른’ 시를 써왔다는 것인데 한 편의 시 자체가 반전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듭남’을 추구하는 황시인만의 스타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는 사람 한 살이- 이는 망치와 모루, 칼과 도마처럼 쉼 없이 재삼재사, 거듭 담금질과 망치질 속에서 완성되는 미완의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는 긍정과 순명인 동시에 승화, 반전을 꾀하는 속내나 참뜻입니다. 그로써 저승에서의 상면을 약조하고, 서성거릴 시간을 얻고, 눈물 자국을 수습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대개 문장부호가 없는 것이 시라는 장르의 특성인데 그의 시에는 쉼표나 마침표가 자주 보입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생처럼 쉬고, 마치며 감상하다 보면 시의 알짬을 문득 깨치게 되지요. ‘나날’이 ‘나의 날’로 읽히는 그런 행 바꾸기도 유심히 새겨야 하고요.

...... 인생이란 무엇인가. 신神을 닮은 것을 두고 꿈이나 꾸면 고작이지. 하지만 신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 거짓으로 졸 때와 매한가지로 밤이 되고 궁핍한 가운데 지내노라면 인간은 튼튼해지는 법이거든. 그 사이에 영웅은 청동靑銅 요람에서 자랄대로 자라는 모습을 보면 마음도 신처럼 튼튼해지는 것. 이때 신들은 뇌우를 몰고 들이닥치지. 이때를 놓칠세라 나는 잠을 청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처럼 벗과도 떨어져 지내고 벗을 기다리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시인은 궁핍한 시대에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그대 벗은 말한다. 시인은 거룩한 밤에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는 주신酒神의 거룩한 사제司祭나 다름없다고. - 횔덜린 비가悲歌「빵과 포도주」부분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횔덜린(1770-1843)을 ‘시인 중의 시인’으로 상찬하면서 이렇게 석명합니다. “횔덜린이 건설하는 시의 본질이야말로 다시 없는 역사다. 시의 본질은 역사라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 그리하여 역사가 되는 본질과 시의 본질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가버린 신, 아직 오지 않은 부재의 시간이 궁핍하지만 시인은 취하고 노래할 수 있어 더없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앞서 말한 동양의 ‘시사’와 짝패인 바로 그 개념입니다. 편언절옥- 황동규시인은 한국 시인 중의 시인이다, 독일에서 횔덜린이 그렇듯이.

감각이 시들어도 / 아픔은 방금 뱀 입에 물린 개구리 같이 생생하다. / 아픔을 노래하자 * 돌이켜보는 청춘은 늘 찡하다. / 삶에서 추억이 제일 더디 가는가? * 시를 쓸 때 말을 비틀라는 말을 듣는다. / 말을 비틀다니! 그건 개그맨의 일. / 시인은 말에 의해 비틀리는 자이다. / 말에 비틀리면 비트는 말의 근육과 뼈가 보인다. * 사랑과 죽음, 이 두 가지는 / AI가 앞으로 계속 체득하려 들 것이다. / 그러나 마지막으로 가지고 싶어 할 것은 우리가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나. - 황동규「일곱 개의 단편斷片」 부분

자 이쯤에서 저의 소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람들 그 누구나 황동규나 횔덜린처럼 ‘말의 근육과 뼈가 보이는 시’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를 포함해 그런 웅숭깊은 눈을 갖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황잡하고, 던적스런 세상에서 몸과 마음을 부리며 살아내는 나날의 아픔과 비밀을 저마다 기록하고, 노래하자는 것입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또 다른 변화가 온다 해도 김형석, 이어령 석학들이 그런 본새를 지녔기에 그들의 글을 즐겨 찾아 읽는 까닭이겠지요.

지난 1년 동안 허접하고 난삽한 ‘밑줄 이야기’ 읽어주셔서 무한히 고맙습니다. 한 해가 그렇듯 이승에 온 것은 그 무엇이든 저승으로 가고, 또 무엇이든 오겠지요. 가지만 하고 오지 않는다면, 또한 오기만 하고 가지 않는다면 이승이 아니죠. 우리는 그런 사이에서 저마다의 ‘그승’을 세 들어 살다 비워주는 것이지요. 송구영신- 기쁜 마음으로 가는 것 그 속의 잊을 것들 환송하고, 올 것 할 일들 마중하시는 연종지절 나시길 비손합니다. 마지막으로『오늘 하루만이라도』첫 쪽의 ‘시인의 말’을 부기하면서 이번 글을 매조지 할까 합니다.

마지막 시집이라고 쓰려다 만다. / 앞으로도 시를 쓰겠지만 그 시들은 / 유고집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는 건 맞는 말이다. / 그러나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없듯이 / 내 시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자. //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 2020년 가을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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