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걱정하랴!’ 천하가 같이 돌아가지만 길이 다르고, 일치하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하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걱정하랴! 해가 가면 달이 오고, 달이 가면 해가 온다. 해와 달이 서로 밀어서 밝은 빛이 생긴다.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온다.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서 세월이 된다. 가는 것은 굽히는 것이요, 오는 것은 펴는 것이다.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

가기만 하고 또한 오기만 한다면 ’이승‘이 아니다. 온 것은 그 무엇이든 죄다 ’저승‘으로 가고, 역시 그 어디에서 무엇인가 오는 법. 하여 잠시 잠깐 ’그승‘을 산다, 사람을 위시한 만물은. 왕자굴야往者屈也 래자신야來者信也- 2천 5백여 년 전에 명시한 굴신- 그 ’굽히고, 펴는‘ 왕래를 1905년에야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증명했다. 완전히 별개로 치부했던 시간과 공간을 시공時空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한 것이다. 공자가 석명한 이「계사전」의 저본은『周易』「상사象辭」11. 태괘泰卦다. “평평하기만 하고, 기울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

시공 속에서 좌표를 바꾸면 시간은 부분적으로 공간으로, 공간은 부분적으로 시간으로 각기 변형된다- 아인슈타인의 이 답은 중세의 사상적 대부 성聖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고백록』에서 실토한 문제였다. “사람들이 내게 묻지 않는 한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물으면, 나는 더 이상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로부터 서양은 중세의 잠에 빠져들었다. 그 속잠은 르네상스시대를 통해서 깨어났고, 근대의 갈릴레이와 뉴턴의 수학적 과학을 거치면서 천지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동양이 노루잠에 시달리며 그 문명을 좇기 시작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걱정하랴!” 고래로 자연의 법도가 그렇다 해도 사람들의 한살이는 걱정거리의 연속이다. 2020년 올해는 코로나 19의 지속적인 확산 속에 역대급으로 긴 54일의 장마와 A급 태풍이 엎친 데 덮치고, 부동산 문제와 끝 모를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이 세상을 황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눈 내리는 겨울철이 오고야 말았다. 그렇다. 물의 순환 그 일습이 1년인데 봄비, 장맛비, 이슬, 서리 다음의 회두리가 눈이다. 소설(11월 22일)과 대설(12월 7일)- 적게나 많이 내린다는 그것 말이다, 눈.

현懸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라 島村 앞에 있는 유리창을 열었다. 차디찬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처녀는 차창 밖으로 잔뜩 몸을 내밀더니 멀리 대고 외쳤다. “역장니임, 역장니임!”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장경룡 옮김「설국」도입부

해마다 이맘때면 톺아 보는 중편소설- 36살의 작가가 1935년부터 1947년까지 여러 문예지에 발표했던 12편을 그러모아 완성한「설국」은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1913년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가 시집『기탄잘리』로 수상한 이래 동양인으로는 두 번째로 받은 것. 73세를 일기로 자살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려서 부모님과 조부모를 잃은 천애의 고아였다. 피붙이와의 사별과 병약한 체질이 소설의 문구 그대로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상징의 세계‘를 그리게 했음이 분명하다.

눈의 빛깔은 여지없는 하양인데 고대부터 현대, 미래까지 매력적인 문학적 소재다. 힘겹고 고단한 그 엄동 같은 삶을 위무하며 잊게 하는 자유로운 눈송이... 설원은 추잡하고 던적스럽고 난잡한 세속적 공간을 뒤덮어버린다. 순수, 처녀, 정결, 순진무구를 상징하는 눈빛은 태곳적부터 가장 충성스럽고, 강하고, 보편적인 바로 햇빛과 동일시되었다. 자연의 어떤 색깔에도 그런 힘은 없는데 하늘에서 쏟아지는 해와 눈- 그 빛깔 만이 절대적이다.「설국」도입부의 눈은 새까만 ’밤의 밑바닥‘ 마저 새하얘케 환치시키며 독자들을 진정한 고향의 세계로 이끈다. 카프카의「변신」같은 설정은 서구인들에게는 실낙원- 그 동산으로의 회귀를 부추긴 것이다.

성에가 하얗게 서려 하늘도, 구름도, 산도, 물도 몽땅 흰색뿐. 호수에 형체라곤 오직 생채기 같은 긴 방죽 하나, 점 같은 호심정 하나 그리고 겨자씨 같은 작은 내 배. 그 배 안에 좁쌀 같은 두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정자에 오르니 웬 사람 둘이 담요를 깔고 마주 앉았고, 아이 하나가 술을 데우는지 화로가 한창 끓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몹시 기뻐하며 술을 권했다. 나는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큰 잔으로 세 잔이나 마시고 일어났다. 성씨를 물었더니 금릉金陵에서 온 나그네란다. 돌아와 배에서 내리는데 뱃사공이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양반만 바보인 줄 알았더니 더 심한 바보들도 있었네그려.” - 장대張岱「호심정에서 눈을 구경하다湖心亭看雪」

큰 눈이 사흘이나 계속해서 내리던 어느 해의 엄동지절- 한밤중에 잠이 깨었지만 백주 대낮인 줄 알았을까? 명나라 말기의 장대(1597-1689)는 서호西湖에서 작은 거룻배를 타고 그 한복판의 정자로 향한다. 그는 왜 시공이 멈추어버린 ’설국‘으로 떠난 것일까? 300자에서 1,000자 내외의 시적 산문인 소품小品의 대가. 그로서는 단절과 구획, 경계가 없는 눈의 나라에서 한 소식을 듣자는 속내가 있었을 터. 내리막으로 치닫는 땅의 나라에서 각자도생의 살천스런 세상을 벗어나고자, 스스로 구원의 길을 떠났을 성싶다. 폭설이 내린 한밤의 장엄한 풍광에서 겨자씨만큼의 희망을 품고 새로운 나라를 그려보자는 뜻 그것이리라. 그런데 정자에는 이미 자신과 똑같은 ’바보‘들이 당도해 있었다.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 큰 왕의 채찍! / 마패 없이 거듭 국영을 넘는 /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 무식하게 무식하게 – 황동규 시「삼남三南에 내리는 눈」전문

시산혈해- 충청도의 계룡산 그 높이로 시체가 쌓이고, 비단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하기혈지류저야而何其血之流杵也: 피가 흘러 절구공이를 표류하게 하는 일(『맹자』14 진심장구盡心章句 하下)- 맹가孟軻가 조선의 강토에 다시 환생한다면 1894년 11월의 참상을 믿었을 것이다. 지극히 어진 4만여 농민군이 1, 2차 접전 끝에 2천여 명 이쪽저쪽의 수효만 남았으니 말이다. 그해 12월 5일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웅진의 우금치에 눈발이 분분했다. 저 장대가 보았다면 분명 산마루의 정자로 몰려가는 얼마간 거뭇한 겨자씨만한 좁쌀들이 눈보라에 흩날렸노라 읊었을 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항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살아갔다. // 닦아라, 사람들아 / 네 마음 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 아침 저녁 /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 볼 수 있는 사람은 / 외경을 알리라... 연민을 / 알리라 / 차마 삼가서 / 발걸음도 조심 / 마음 아모리며. // 서럽게 / 아 엄숙한 세상을 / 서럽게 / 눈물 흘려 - 신동엽 시「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부분

하루는 작은 일생- 눈 밝은 쇼펜하우어의 이 정언에 기대면 한 해는 조금 큰 일생일 터. 그런 해가 쌓이면서 이순을 넘기자 불쑥 귓가의 머리카락이 새하얘졌다. 머리가 세었다는 그 나이듦의 색조는 ’외경과 연민의 정‘ 깊은 신중, 내적 평온, 지혜를 상징한다. 죽음과 수의의 그 하양이 가까워진 것인지. 1년 사계절이 겨울의 눈으로 마감되듯 삶이라 부르는 게 여러 가지 색을 품고, 내고, 섞여지다 마침내 순진무구의 본령 그 흰색을 되찾는 것은 아닌지. 올겨울 다 가기 전에 눈 들어, 내리는 눈에게 물어봐야겠다. 짜장 녹아들어 눈물 된 그 눈은 답을 못하리라. 이번「밑줄 이야기」를 매조지 하려는데 연암 박지원이 말곁 하고 나서며「열하일기」의 1780년 7월 8일을 펼친다.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돌아다니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멋진 울음터로구나. 크게 한번 울어 볼만하도다!”

눈 맞으며 눈물의 자국도 없이 울기 좋은 폭설의 설원- 부디 올겨울에는 꼭 그런 날 손꼽아 기다렸다가 마음이 온 그곳, 백색의 세상으로 원행해보시길 바랍니다,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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