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오늘날 수학 서적들은 기호로 넘칠 지경이다. 그러나 음표가 음악이 아닌 것처럼 수학적 기호가 수학은 아니다. 악보는 음악을 표상한다. 그 악보가 악기에 의해 연주되거나 노래로 불려질 때 당신이 듣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음악이 살아나서 우리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은 연주 속에서이다. 음악은 인쇄된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속에 있디. 수학도 마찬가지다. 종이 위에 있는 기호들은 수학의 표상일 뿐이다. - 케이스 데블린(2003)『수학의 언어: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수학』서론「수학은 무엇인가?」

11월 중순- ‘하얀 쥐의 해’도 어느덧 회두리판에 이르렀다. 해마다 이맘때면 세월과 나이, 시간 같은 낱말들이 자주 떠오른다. 돌아보면 올해 전대미문의 그 기가 찬 일들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대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코로나 19의 장기화 속에 역대급 가장 긴 장마와 A급 태풍이 엎치고, 전세대란 등속의 부동산 문제까지 덮친 2020년- ‘희망이 없는 것은 바로 상처가 없는 것’이라는 정언이 있기는 있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 부리고 살아내면서 긁히고, 찔린 상처가 너무나 깊은 경자년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트롯의 재발견’이다. 1947년생 가황歌皇 나훈아가 15년 만에 출연한 추석특집 TV프로그램이 그 정점이었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 왜 이렇게 힘들어 /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 나훈아 작사 작곡「테스형」1절

사람의 줄임말은 ‘삶’이고, 오늘의 그것은 ‘올’이다. 만물 중에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가장 어렵다는데 ‘사람으로’ 살아가니 진정 감사하다. 하지만 또 오고야 마는 내일 그 어느 날에 죽어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다. 그렇다.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다면, 역시 오기만 하고 가지 않는다면 이승이 아니다. 그런 세월과 시간에 순명하며 그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데 왜 이리 힘들고, 사랑마저 살천스런 그림자를 남기는 것인지... 고래의 그 어떤 경구나 아포리즘보다 사람들을 위무하며 푸념을 승화시키는 노랫말이다. ‘집콕, 방콕’으로 강제 유폐된 관중들이 허울과 가식을 벗어던지고 떼창을 부르며, 저마다의 심연을 돌아보게 하는 트롯이 대세인 시대다.

사실 고대 그리스부터 서양 문명사에서 수학과 음악은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되었다. 양자 모두 우주와 인간사의 질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보다 100여 년 앞선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원리는 수數다” 선언하고, 우주를 질서와 조화라는 뜻의 ‘코스모스kosmos’로 명명했다. 악樂의 코스모스가 그렇듯 무시무종, 광대무변의 천지도 수에 의존한다고 파악한 것. 이런 ‘수적 신비주의’는 동체이명의 시간과 공간으로 심화 되어 철학적 사유의 길을 열었고, 플라톤이 기하학으로 발전시켰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올 수 없다!”

천수天數는 1이요, 지수地數는 2이다. 천수는 3이요, 지수는 4이다. 천수는 5요, 지수는 6이다. 천수는 7이요, 지수는 8이다. 천수는 9요. 지수는 10이다. 천수가 다섯이요, 지수도 다섯이다. 다섯 자리가 서로 얻어서 각각 합하게 되니 천수가 25요, 지수가 30이다. 천수와 지수가 모두 55이니, 이것은 변화를 이루고 귀신의 수를 행하기 위함이다. 대연大衍의 수가 50이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49이다. 나누어 둘이 되어 두 개 天地를 본뜨고, 하나를 걸어掛 삼재三才를 본뜨고, 이것을 4로 셈하여 사시四時를 본뜨고, 남은 수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윤달을 본뜨니, 5년 만에 다시 윤달이 되므로 다시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걸어 놓는다. 건책乾策이 216이요, 곤책坤策이 144이다. 모두 360이니 1주년에 해당시킨다. 두 편의 책策이 11,520이 됨은 만물의 수에 해당한다.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

지은이나 엮은이는 물론 그 연대도 알 수 없는『주역』- 2천 5백여 년 전 동양은 서양과 다르게 우주적 질서를 수리적으로 적시한 죽간을 만들었다. 그 복희 8괘와 문왕의 64괘를 공자가「계사전」에서 석명했는데 그 어떤 천문학자보다 상세하다. 공자는 “몇 년의 시간이 더 주어져 쉰 살까지『주역』을 공부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 토로했다.(『논어』7「술이」) 바로 그 서책에 코스모스적 우주의 질서, 조화가 담겨 있고, 그 일단이 음악으로 표상된다고 인식한 것이다.

공자께서 노나라의 태사에게 음악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음악은 배워 둘 만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여러 소리가 합하여지고, 이어서 소리가 풀려 나오면서 조화를 이루며 음이 분명해지면서 끊임이 없이 이어져 한 곡이 완성되는 것이다.(『논어』3 「팔일」) 공자께서는 사람들과 노래를 자리에 어울리시다가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하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시고는 뒤이어 화답하셨다.(7「술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악사인 지가 초기에 연주했던 관저(시경 국풍의 첫 번째 시)의 마지막 악장은 아름다움이 흘러넘쳐 귀를 가득 채웠도다“(8「태백」)

『논어』전편에 걸쳐 음악과 관련된 일화는 차고 넘친다. 시에서 감흥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 자립하고, 음악에서 완성을 이룬다- 음악을 삶의 완성 그 최고의 경지로 보았던 공자로서는 당연한 집적이다. 유가의 조종에게 악은 자신의 완성인 동시에 세상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평온하게 살아가는 대동세계의 징표였다. 공구는 그런 내일을 꿈꾸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감상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천하의 현자도 미처 실토하지 못하는 속내를 드러낸 일화는 이렇다.

공자께서 위나라에서 경쇠를 두드리며 연주하고 계셨는데, 삼태기를 메고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마음에 미련이 남아 있구나. 경쇠를 두드리는 모습이여!“ 조금 있다가 다시 말하였다. ”비루하구나, 땡땡거리는 소리여!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둘 뿐이로다. 물이 깊으면 아래옷을 벗고 건너고 물이 얕으면 옷을 걷어 올리고 건널 일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을 버리는 것은 과감하지만, 그런 일이야 어려울 게 없지.“(『논어』14「헌문」)

산다는 것은 그런 것 아니던가? 아무리 세속에 미련을 버린다 해도 자꾸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장자는 “천지의 유구함이 나와 함께 살아 있고, 만물의 다양함도 나와 함께 하나다. 이미 하나인 이상 또 달리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반문했다.(『장자』제2「제물론」) 어려운 담론이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1과 그것을 표현한 말로써 2가 되고, 그 2와 본래 분리되기 전의 1과 합쳐서 3이 된다.”는 견해로 존재 자체의 ‘3’ 이상의 셈법을 잊으라는 뜻이다. 공자가 사람과 함께 노래하기를 원했다면 장자는 저 대자연의 소리를 홀로 듣고 지내길 바랐다.

사람 한 살이, 한뉘가 그러하거늘 “그 이후 수의 증가는 셈의 명수도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저, 그냥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따르라 권면한 것이다. 사람의 몸 그 백 개의 뼈마디와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내장이 하나인 것처럼 유가와 묵가의 인과 예로 나누고 시비를 벌일 일이 아니라는 일갈이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동서고금 최고의 명문이기에 ‘대자연의 피리 소리’를 제시해본다.

말하자면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게 일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단 일었다 하면 온갖 구멍이 다 요란하게 울린다. 너는 저 윙윙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들어 봤겠지. 삼림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잎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은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지. 그게 바람이 울리면 울기 시작해. 콸콸 거칠게 물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 나는 소리, 나직히 나무라는 소리, 흐흑 들이키는 소리, 외치는 듯한 소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 웅웅 깊은 데서 울려 나는 것 같은 소리, 새가 울 듯 가냘픈 소리. 앞의 바람이 휘휘 울리면 뒤의 바람이 윙윙 따른다. 산들바람에는 가볍게 응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응하지. 태풍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고요해진다. 너는 나무가 바람 때문에 크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볍게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장자』제2「제물론」

훗날 송대의 왕안중王安中은 이런 평을 남겼다. ”책을 덮고 앉아 있어도 윙윙거리는 소리가 귓전으로 밀려듦을 느끼게 된다!“ 당장이라도 첩첩산중에 올라 자연의 바람 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나는 글. 거칠게 묶어보면 구멍은 인간이나 사물의 덧없음을, 소리는 시비를 일삼는 사고방식이나 언설을, 바람은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도道를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피리 소리에 귀를 빼앗기면 자연의 그 소리를 듣지 못함을 경계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내자가 영면하자 두 다리를 뻗고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광경에서 절정을 이룬다. 혜시의 문상에 장주는 이렇게 말한다. ”아내는 자연의 순환에 들어 천지라는 큰 집에서 안식하게 되었네...“

사람은 사람과 자연에게서만 배우는 법. 장자의 ‘자연’이든, 공자의 ‘사람’이든 죄다 하나의 여럿, 여럿의 하나인 ‘소리’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은 마음의 그림“이라는 정언을 재삼 되새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이다. 수학적 기호나 음악적 악보도 그런 것. 스스로 문제를 풀고, 읊어보자는 수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조급함과 성급함이 일을 그르친다고 했다. 때로는 시간과 세월이 자신을 이기도록 두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언어와 음악이라는 꽃은 시간 속에 싹 트고, 피어나고 종당에 열매를 맺는다.

겨울이 서는 입동立冬도 지났고, 눈이 적게 내리는 소설小雪이 바투인 요즈음 산목들을 새삼스레 응시한다. 봄에 내고 여름 내내 키운 잎새들 만산홍엽- 그 배반낭자의 송별회 마치고, 이제 엄동의 삭풍과 눈보라 맞을 차비하는 나목들. 저 눈발 분분한 설원이라도 결코 우리들 삶의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절기 좇아 자연, 사람과 합창하는 순박하고 어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말이다.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