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2020년 10월의 마지막 주- 예년 같으면 단풍철의 행락객과 지자체 주관의 축제 현장으로 들꾀는 인파로 전국의 도로가 북새통을 이룰 때다. 그러나 지속적인 코로나 19의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 행정명령과 방역 수칙 준수 등으로 잠잠하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 떠나는 여행과 일상적인 모임마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문화계 역시 침체 국면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공연장, 영화관은 여전히 입장이 제한적인데 랜선공연과 온라인 전시로 돌파구를 찾지만 평년의 ‘문화의 달’ 그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가 예쁜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림에 표현된 실제 대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네가 그린 연못이 있는 정원은 그 자체로 즐거우며, 이런 유의 미술은 특히 거기에 묘사된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풍긴다. 시끄러운 도시의 고층 아파트에 촉촉한 야외의 고요함을 환기시키는 그림의 복제품이 걸려 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알랭드 보통. 존 암스트롱『영혼의 미술관』방법론 중「희망」

2016년 영국 초판의 원제는『Art as Therapy』인데 2018년 한국어로 번역.출판되면서 바뀌었다. 이 책은 영국 출신의 미술사가인 존 암스트롱과 함께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를 주제로 나눈 대담을 알랭드 보통이 집필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여행의 기술』과『행복한 건축』으로 독자층을 확보하며,「인생학교」의 개교로 프랑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고 있다. 스위스 출신인데 영국으로 이주해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TV 다큐멘러리 기획자로 참여했고, 예술과 철학으로 활동 분야를 넓힌 작가다. ‘유머스러한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도시인의 일상과 감성을 세밀하게 관찰해 쉽고 경쾌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예술은 습관에 반대하고 우리가 경탄하거나 사랑하는 것에 갖다 대는 눈금을 재조정하도록 유도해 그 소중한 것을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맥주 캔의 생김새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맥주 캔은 우리가 마주치는 하찮고 실용적인 사물에 속한다. 그러나 1960년 미국의 예술가 재스퍼 존스는 맥주 캔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 새롭게 보도록 유도했다. 그는 청동으로 맥주 캔 두 개를 주조하고, 표면에 회사의 이름을 써넣은 뒤, 작은 기단 위에 나란히 세워놓았다... 우리는 난생 처음인 듯 그것을 보게 되고 그 흥미로운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다. - 알랭드 보통. 존 암스트롱『영혼의 미술관』방법론 중「감상」

COVID-19가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기업의 재택근무와 화상회의가 보편화되고, 각급 학교는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고 있다. 이른바 언택트, ‘비대면 사회’로 진입하며 온라인 쇼핑과 간편결제, 택배 물량이 급증하고, 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 가입자가 폭증하는 이른바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삶의 기준과 표준이 수립되는 현실이다. 포스트 코로나- 무엇이 사라지고, 남으며 또한 어떻게 변할 것인가? 바이러스의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블록체인, 챗봇, AI, 사물인터넷, 증강현실, 자율주행... 이런 제4차 산업혁명의 용어들이 스멀스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상황에서 사람들은 저 발터 벤야민이 말한 ‘깊은 심심함’에 자신도 모르게 빠지게 되었다. 무한 반복되던 삶의 쳇바퀴 그 페달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가족과 집을 재발견하고, 소소하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역설적으로 도회적 구획과 단절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수면이 육체적 이완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완화다. 벤야민은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서 더욱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 시간적 이완의 소멸과 함께 자신과 공동체에 귀를 기울이던 재능도 점차 소실된다는 것. 그러나 코로나 19는 역설적으로 그런 염려를 불식시키고, 점차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떤 그림을 액자 틀에 끼워 넣거나, 또는 올바른 주위 환경 속에다 걸어 놓았을 때, 나는 종종 마치 내가 그 그림을 그린 것처럼 의기양양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이 말은 엄밀히 옳지는 않다: “마치 내가 그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의기양양한”이 아니라, 마치 내가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도왔던 것처럼, 말하자면 내가 그 그림의 작은 일부를 그렸던 것처럼 자랑스러운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비범한 풀밭 정리자가 마침내, 어쨌든 최소한 자기가 아주 작디작은 풀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기의 일이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제 아무리 작디작고 초라한 풀일지라도 그 생성 과정은 그에게는 전적으로 낯선 것이며, 미지의 것이다. - 루트 비히 비트겐슈타인『문화와 가치』

진리는 일상 언어에 숨겨져 있다- 언어는 물리적인 기호의 배열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정신작용이나 세계의 그림도 아니며, 일정한 생활양식과 규칙에 따라서 영위되는 행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그의 이론을 중시하는 언어행위론과 일상언어학파는 작금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 속담에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언어의 일상성을 회복하고, 그 저변의 의미가 제대로 소통되는 시대가 진정 열릴 것인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비말이 튀지 않도록 말을 삼가고, 침묵하는 코로나 시대가 말이다.

우리의 일상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존재 양태들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표면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을 분석해 보면, 일상생활로부터 삶의 결style 자체로 넘어가는, 나아가 예술작품에까지 다다르게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오솔길이 드러난다. - 장 그르니에『일상적인 삶』서문

카뮈의 스승으로 유명한 장 그르니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상적인 일 12가지를 제시했는데 다음과 같다.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 사실 이러한 항목들은 대체로 코로나 이전의 삶에서는 잊고 지내던 것들이다. 과연 사람들이 저마다 총체적으로 이런 순간들에 특별한 의미를, 일종의 긴장을 느꼈던 적이 있었을까? 물론 발걸음의 여행이 멈추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여행은 내면으로 떠나는 것 아니었던가. 문득 이번 ‘밑줄 이야기’를 매조지 하려는데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유한준(1732-1811)이『석농화원』을 펼치고 발문을 가르킨다.

그림을 아는 사람이 있고,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또 그림을 보는 사람이 있고, 그림을 소장한 사람이 있다. 그림을 소장하기만 한 사람은 그림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림의 오묘함은 거죽과 찌꺼기나 보는 앞의 세 부류 사람에게서는 드러나지 않고, 그림을 아는 사람에게서나 드러난다. 그림을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진정 보게 되며, 보게 되면 소장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그저 소장만 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부디 재스퍼 존스의 ’맥주 캔‘을, 모네의 ’연못이 있는 정원‘을, 비트겐슈타인의 ’풀‘을 제발견하듯 소소한 일상성을 회복하고, 자신이 곧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는 아름다운 늦가을 보내시길 비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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