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원 박사 / 뉴스티앤티
서준원 박사 / 뉴스티앤티

어느 시대에서나 자유의 폭과 깊이는, 순종과 저항의 증폭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변혁과 혁명이 발생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랄까, 역사의 변증법이랄까. 작용(正)과 반작용(反)이 궁극적으론 합(合)의 단계로 접어들고, 역사는 다시 작용(正)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역사는 돌고 도는 영원한 뫼비우스의 띄다. 역사는 지난 일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과거에서 잘 배워서 현재와 미래를 잘 헤쳐 나가려는 고난한 과정이자 지혜나 다름없다.

자유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지난 날의 굴곡진 우리 정치사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권이 원천봉쇄 당하면 저항이 시나브로 더 커져갔다.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은 힘으로 억누르는 못된 습성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그 어떤 정권도 “합법적 공권력”으로 포장된 권력행사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기본권을 제한하면 할수록 국민을 통제하기가 수월하겠지만, 이에 수반되는 반작용의 파괴력-파급력을 간과해선 안 된다.

말만 번지르 하게 내쏟는 정권, 포퓰리즘과 선전-선동에 능한 정권일수록, 별의별 구실을 앞세워 “합법적 공권력” 행사에 열을 올린다. 이런 정권은 합의와 설득을 슬그머니 접어두면서 국민의 목소리 마저 세심하게 경청하길 꺼려한다. 권력의 정통성이 취약하거나, 별다른 준비와 대책도 없이 정권을 잡은 세력일수록 “합법적 공권력”을 늘상 강조하며, 정권의 취약점을 보완해 줄 유일무이한 무기로 취급한다.

코로나19는 사회를 변동시킬 중대한 요인이다. 허나, 우리 헌법재판소는 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못 박아 두고 있다. 상호이익과 이해관계가 상이한 집단 간의 목소리는 집회와 시위를 통해 대변된다. 그래서 헌재는 정권이 이를 반영 할 의무와 책무를 짚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코로나19라 할지라도 국민의 기본권을 쉽게 굴복-제한-통제시켜선 안 된다.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한 토론마저 취약한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개천절, 하늘이 열리고 우리민족이 나라를 세운 날. 하필이면 이런 날에 분단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그래서 독일이 참 부럽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천절 집회와 시위는 무조건 막겠다고 천명하자,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까지 합세하여 목소리를 높혔다. “합법적 공권력” 카드로 개천절에 광화문 광장을 경찰버스로 옹벽을 쌓아 기괴망칙한 산성을 쌓아버렸다. 국제사회에서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가황 나훈아는 언팩트(비대면) 공연에서 절창했다. 덕분에 추석 명절은 참 포근했지만, 개천절 광화문 광장은 싸늘했다.

국제사회는 광화문 광장의 기괴한 장면을 보고 아직도 저런 나라가 있나 싶어 의아해 할 것이다. 지난 주말에도 서유럽 국민은 광장으로 몰려들어 코로나에 의한 기본권 제한반대 시위를 했기에 더욱 그런 판단을 했을 것이다. 아울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원시성(차벽봉쇄)을 재발견했을 것이다. 아니면 계엄령이라도 선포 된 줄 알았을 것이다.

현 정권의 대국민 합의와 설득은 코로나19에 밀려났다지만, 놀이동산과 쇼핑몰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래서야 어디 방역청을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자유권의 제한과 차별적인 방역대응이 기본권의 형평성마저 모호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와 잣대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국민을 대상으로 공정성이 희박해지면, 코로나19의 방역가치도 함께 불신을 받을 수 있다. 이 사안에 대해선 방역청이 직접 답해야 한다.

 

자유는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들어도 지켜 내야 할 가치

합법적 공권력 vs 국민의 기본권의 충돌, 어찌할 것인가?

무엇이 두려워서, 광화문 광장에 경찰차벽 산성구축

한 쪽은 막고, 다른 쪽을 풀고. 공정과 형평성의 잣대는?

 

문재인 정권은 설득과 대화에 궁색하고 왜(?) 매사에 자신이 없는지 궁금하다. 국민의 목소리를 막는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닐뿐더러, 원천봉쇄는 엄연한 기본권 훼손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극단적 우파와 좌파는 골칫거리다. 허나, 우리의 경우 평화적 시위가 주를 이루면서 시국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소극적 집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집회 단체 중에 종교집단의 경우에도 종교적 신념에 충일한 자들로 국가의 근간을 와해시킬 정도의 힘도 능력도 없고 특히 폭력적 행위로 변질된 사례가 없었다. 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막아 선 꼴이다.

여타 국가에선 종교세력과 극단적 우파와 자파에 의한 폭력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인류사에서 보면 코로나19는 한시적인 현상이고, 이런 현상은 언제든지 재발생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이에 비하면 국민의 기본권은 영구성을 지닌 가치이기에, 그 어떤 권력자와 정권이라도 훼손시켜선 안 된다. 기본권은 결코 오염되서도 안 되지만, 코로나19 탓에 점점 기본권 마저 감염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기본권 훼손에 대한 백신은 저항과 희생이다.

아침에 눈 뜨면서 부터 하루 종일 안전안내 문자가 셀 수 없이 쏟아진다. 지자체도 질세라 가세하고 있다. 유사한 내용을 담은 문자가 연신 날라 온다. 그렇다고 문자를 거절 할 수도 없다. 온 국민이 전체주의적 관리체제에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다. 좋든 싫든 이를 접해야 하는 것도 엄청난 스트레스다. 친절한 정보제공이라지만, 도가 지나치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힘든 민초들에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언론과 방송의 정보제공도 흡수하기 힘든 데, 정부가 제공하는 과도하고 친절한 문자정보가 정보의 홍수에 가세한 셈이다. 매일 이런 일을 겪다보니 이젠 정보의 중요성과 진위여부와 가치판단마저 흐릿해지고 있다. 과잉정보 제공은 자칫하면 정보의 무관심과 정신적 부작용을 유발시킬 수 있다. 통합적인 관리체계, 정부와 지자체의 협력이 아쉽다.

국민은 단순한 통계 나열보다 과학적 검증과 대처방안과 근본적인 해결책을 원하고 있다. 과학은 실험을 통해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가변성이 농후한 여타 정책과 달리 방역정책은 비교적 대응책이 단순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과학자들과 방역당국은 코로나19의 별다른(근본적 치유 대책) 개선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관계자와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현실에 맞는 효율적인 대처방안을 여태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탓에, 애꿏은 의료진만 값진 고생을 하고 있다.

아직도 국민은 코로나19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방역청이 시도 때도 없이 지나치게 펜데믹을 강조하다 보니, 일상적 삶 자체가 주눅이 들 정도다. 과학적 검증과 판단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19를 일상 속으로 함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그래도 기본권의 아성은 쉽게 훼손되면 안 된다. 코로나19는 과학적 접근으로 풀어낼 수 있기에, 기본권의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소한 규제와 통제에도 무의식적으로 대처하면, 기본권에 담겨 있는 자유와 인권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기본권이 훼손되면 복구 시키는 데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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