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맛 잃은 과일 '우수수'…한 달 앞 추석 물량 수급 비상

추석을 한 달여 앞둔 농촌 들녘이 풍요로움은 온데간데 없고 농민들의 한숨과 탄식으로 물들고 있다.

하루걸러 하루꼴로 내리는 비 때문에 벼가 웃자라고, 고랭지 배추는 속이 곯아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다. 제철 맞은 과일도 습한 날씨 속에 물기를 잔뜩 머금어 제맛이 나지 않는다.

'가을 문턱에 접어든다'는 입추가 지나면 농촌은 풍요로워진다. 고추·콩·깨 등 가을걷이가 시작되고, 포도·복숭아 등 제철 과일도 한창 단맛이 오른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결에 벼가 무르익는 시기도 이 무렵이다.

조선시대는 입추 뒤 닷새 이상 비가 내릴 경우 이를 멎게 하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해질 만큼 이 시기 왕성한 햇볕과 적당한 기온 차는 풍년 농사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올해 날씨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덕이 심하다.

가뭄과 폭염이 이어지더니 입추(이달 7일)를 넘기면서부터는 가을장마라도 시작된 듯 연일 비가 퍼붓고 있다.

햇볕을 받지 못한 벼는 낱알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수확을 코앞에 둔 과일과 고추 등은 알이 터지거나 낙과돼 못쓰게 됐다. 배추·무 모종도 습한 토양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려 김장 채소 파종까지 차질이 생기고 있다.

이달 들어 서울에는 17일간 비가 내렸다. 대전·대구에도 각각 18일과 17일씩 빗방울이 들었다.

궂은 날씨 속에 일조시간은 급격히 줄어 서울은 113.3시간, 대전·대구는 134.2시간과 132.7시간에 머물렀다. 지난해 같은 기간 서울 189시간, 대전 215.5시간, 대구 213.6시간에 비하면 30%가량 짧다.

강원도 춘천의 경우 16일 동안 263.4㎜의 비가 내리면서 일조시간이 191.5시간에서 101.9시간으로 거의 반토막났다.

잦은 비와 부족한 일조 때문에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환경이 이어지는 것이다.
 

농촌진흥청이 밝힌 지난 15일 기준 전국 평균 벼의 전체 길이(최장)는 100.8㎝로 예년보다 7.6㎜ 길지만, 포기당 줄기(주당 경수)는 16.4개로 예년보다 0.1개 적다.

김제평야 등에는 벼의 줄기 사이 통풍이 안 돼 발생하는 잎집무늬마름병(문고병)까지 번지는 상황이다.

이상기후 속에 웃자란 '꺽다리 벼'는 낱알을 맺더라도 '쭉정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 낱알이 영그는 과정에서 무게를 못 이겨 쓰러질 우려도 높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지금 단계에서 벼 작황을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이삭이 올라오면서 열흘 이상 궂은 날씨가 이어지면 풍년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사과 탄저병

밭작물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추석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충분한 햇볕을 받지 못한 배와 감 등은 크기가 예년에 훨씬 못 미친다. 사과는 갈색 반점이 생기면서 썩는 탄저병이 빗물을 타고 빠르게 확산하는 추세다.

'추석 사과'라고 불리는 홍로 수확이 시작됐지만, 붉은빛이 제대로 돌지 않고 당도도 떨어져 좀처럼 제맛이 나지 않는다.

김정열 충북 영동 배 연구회장은 "과일은 일교차가 커지면서 살이 붙기 시작하는 데, 올해는 폭염에 이어 곧바로 비가 이어지고 있다"며 "이맘때 야구공만큼 자랐어야 할 신고배는 덜 자랐고, 추석 차례상에 오를 원앙배는 단맛이 돌지 않는 등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경북 영천·청도·경산 등지의 복숭아는 최근 폭격이라도 맞은 듯이 우수수 떨어졌다. 잔뜩 빗물을 머금은 복숭아 꼭지가 무르거나 썩어 나무에 매달려 있지 못한 것이다. 땅에 떨어진 복숭아 주변에는 벌레까지 들끓어 성한 복숭아마저 병충해에 노출돼 있다.
 

폭삭 주저앉은 배추밭

강원도의 고랭지 배추밭에는 다 자란 배추가 곯아 썩어가는 상황이다.

물을 잔뜩 머금은 땅에서 배추 잎이 누렇게 녹아내리고, 속이 제대로 차오르지 않아 폐기하는 물량도 부지기수다.

평창군 대관령면 차항리에서 배추농사를 짓는 신모(59)씨는 "배추는 결구율(속리 꽉 찬 정도)이 70% 이상 나와야 출하할 수 있는데, 지금은 절반도 건져내기 힘든 상황"이라며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는 밭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충남 논산의 상추도 성장이 멎은 상태에서 짓물러 농민들을 울상짓게 한다.

상추는 보통 1상자에 4㎏씩 담아 출하하는데, 빗속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상추는 작년의 2배 이상 담아야 겨우 무게를 맞출 정도다.

삼겹살 싸먹는 꽃상추(4㎏) 도매가격은 1만5천원으로 작년보다 50% 이상 올랐다. 그러나 수확량이 그 이상 줄어들면서 농민들은 손에 쥘 돈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농민 백남규씨는 "폭염 속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상추가 습한 기온 속에 짓물러 엉망이 된 상태"라며 "상추농장 10곳중 8곳은 시장에 내놓을 만한 물량이 없다고 보면 된다"고 심각성을 전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할 경우 추석 농산물 가격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박미성 팀장은 "올해 추석이 평년보다 늦어 아직은 다소 여유가 있지만, 궂은 날씨가 이어지거나 태풍 등 기상 변수가 생길 경우 과일 등 제수품 가격이 상승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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