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코로나 19에 역대급 긴 장마가 엎친 데 슈퍼 태풍까지 덮친 2020년! 웃음꽃 피는 소리보다 울고불고 신음뿐인 경자년도 백로를 넘어섰다. 한 철에 6개씩 보름마다 드는 24절기- 9월 7일이 처서와 추분 사이의 13번째 백로였으니 중추에 다다랐다. 올해는 윤사월 탓에 추석이 10월 1일인데 봄비, 장맛비, 이슬, 서리, 눈... 물기운의 치환 그 한 해가 더디게만 느껴진다. 해도 그렁저렁 아침 햇살에 윤슬의 하얀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 가로수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을날에」부분

주여, 때가 왔습니다- 이맘때면 햇살 못 미치는 가슴 속에서 꺼내어 읊조리는 명시. 독일의 릴케(1875-1926)는 어느 작가보다 편지를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많은 사람과 편지로 교류했는데 일생에 걸쳐 수천 통에 이른다. 릴케에게 편지는 자신의 시상과 일상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형식으로 친밀한 소통의 매개물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서간집『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넘기다 보면 그의 시편이 더욱 심오하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인으로부터 나와서, 외부로부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서서히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운명이 그들 내부에서 살고 있는 동안 그것을 흡수해서 자신 속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모르고 지내기도 합니다. ... 경애하는 카프스씨. 미래는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우리만이 끝없는 하늘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선택하거나 방치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독합니다. - 1904년 8월 12일, 스웨덴의 보레비 고르 프레디에서

릴케는 인간적 절대고독을 벗어나는 길은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바로 전해의 4월 8일 아내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다짐한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여름은 결코 내게 최고의 계절은 아니오. 언제 어디서나 여름은 싸워 이겨내야 할 계절인 듯싶소. 그러나 가을만은 금년에도 틀림없이 나의 계절이 될 듯하오.” 가을철이면 자신의 내부에 단단하고 단순하고 단아한 집을 짓겠다는 릴케- 그런 가을을 위해 봄과 여름이 존재할 터. 삶과 창작에 진지하고 엄격했던 그에게 시는 바로 언어와 실존의 ‘집’ 자체였다. 릴케는 군인이었던 카프스에게 편지로 거듭 권면한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라고.

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 / 발 밖의 물과 하늘 창망한 가을일레 / 앞산에 잎새 지고 매미소리 멀어져 / 막대 끌고 나와보니 곳마다 가을일레 – 이덕무「사계시四季詩」전문

250여 년 전의 이즈음- 조선의 이덕무(1741-1793)는 책력에서 백로임을 확인하자 앉은뱅이책상의 서책을 덮고, 발을 걷고 마당에 선다. 서얼 출신으로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두 칸 집에 살았던 형암炯菴- 남산의 산목들 소슬바람에 잎사귀 떨구는데 대문가 회화나무에서 여름철 장하던 울음의 매미는 어디로 간 것인지. 지팡이를 짚고 들길 지나 산길을 걷자니 천지가 추색으로 변하는 중이다. 청장靑莊에게 ‘집’은 처소가 아닌 자신의 내면과 하나 된 조선의 강산 그 전역이었다.

불우한 집안이지만 스스로 부추기며 학문을 갈고닦아 당대 최고의 지성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기에 이른 이덕무. 그는 시전지를 직접 제작한 문장가였다. 꽃에서 채취한 염료로 강토의 국화, 대나무, 나리꽃, 새, 짐승, 물고기... 온갖 생물들이 은은하게 그려진 폭이 좁은 편지지인 화전花箋과 금전錦箋- 형암은 그 종이에 시와 글을 써서 문우들에게 보냈다. 일반적인 편지를 서간, 안서라 부른다면 이덕무의 그것은 재치와 비약, 압축의 척독尺牘이었다.

비록 글 읽는 선비라 하더라도 한 꾸러미의 엽전을 아끼려고 하면 숨구멍이 꽉 막히게 되고, 비록 저잣거리의 장사치라도 가슴 속에 수천 자의 글을 지니려고 하면 눈동자가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선비와 장사꾼」전문

널리 알면서도 편찬하거나 저술하지 못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과 다름없다. 이미 떨어져 버린 꽃이 아니겠는가. 편찬하거나 저술하면서도 널리 알지 못하는 것은 근원이 없는 샘물이나 다름없다. 이미 말라버린 샘물이 아니겠는가. -「열매 맺지 못한 꽃」전문

화가가 옷을 벗고 걸터앉는 모습은 시조리始條理(조리가 넘치는 시작)다. 백정이 칼날을 잘 다듬어 보관하는 것은 종조리終條理다. -「화가와 백정」전문

이렇듯 이덕무의 시문은 당시 조선 사대부와는 확연히 본새가 달랐다. 때문에 중국풍에 기댄 문인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연암은 그를 새로운 진경산수의 ‘국풍’으로 치켜세우고, “만약 공자와 같은 성인이 다시 나타나 여러 나라의 풍속을 관찰한다면, 마땅히 조선에서는 형암의 글을 살펴볼 것이다.“ 라며 옹호했다. 눈을 뜨면 땅 딛고, 하늘 이고 사는 조선의 소소한 소재로 고금의 진리를 품고, 활연대오의 한 소식을 담은 글쓰기- 이는 중국 육조의 유협이 지은『문심조룡』제5권 서기 제25의「서간과 실용문의 양식」과 부합하는 것이다.

서간의 본질을 잘 살펴보면, 그 근본은 흉회를 펼쳐낸 데 있으며, 위축된 의기를 발산하여 자신의 사람됨을 탁언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더러움을 씻어 없애고 정신의 활동에 맡겨 부드러운 기분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작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장의 여러 가지 지류에는 서간에 모인다. 금빛 모습을 번뜩거리면서도 또 소박한 양상을 나타낸다. 영겁의 시간 위에서 부르는 소리에 무한의 그들이 응답한다. 복잡한 잡무도 글을 통해서만이 명료해진다.

컴퓨터와 휴대전화, 사물인터넷의 제4차 산업혁명시대- AI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작곡하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편지’는 오간다. 육필로 쓰고, 우체국에서 부치는 형식이 진화해 개인 블로그나 카페,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화면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누구나 글을 올리고 공유하는 즉시성과 폭발성, 휘발성의 SNS 시대- 서찰과 편지라 부르던 시절의 성실성과 진정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덕무의 척독 그 수준과는 날이 갈수록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다시 책으로』의 저자 매리언 울프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읽는 뇌 회로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그녀는 총 9개의 ‘이상하고, 시대착오적인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편지는 아무리 다급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표현하기 힘든 가벼움과 연결성이 내포되어,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대화를 위한 기초가 되어줍니다. 편지는 뇌를 일시 정지 상태로 이끕니다. 덕분에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2020년의 가을- 이덕무가 절명한 지 꼭 227년이 흘렀지만 그의 편지글은 무한히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부쳐지고 있다. 이번 주 ‘밑줄 이야기’를 매조지 하려는데 또 한 통의 척독이 배달되어 무릎을 치게 한다. 부디 배독하시고, 여여 생생하신 나날들 이어가시길 비손합니다.

태어나서 땅에 떨어진 것은 크게 깨달은 것이다. 죽어서 땅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잊는 것이다. 깨친 이후는 유한하고, 잊은 이후는 무궁하다. 삶과 죽음의 중간은 곧 역참과 같으니 하나의 기운이 머물러 자고 가는 곳이다. 무릇 저 벽의 등잔이 외로이 밝다가 새벽에 불똥이 떨어지면, 곧 불꽃을 거두고 등잔 기름의 기운도 다한다. 또한 어느새 아무 기척도 없이 고요해진다. 외로이 밝은 것이 다해 없어진 것인가? 아무 기척도 없이 고요한 것이 한계가 있는 것인가? - 이덕무「명확한 것과 모호한 것」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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