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세헌 제공
송세헌 제공

장맛비가 오후부터 내일까지 내릴 거라는 예보에

퇴근 후 오랜만에 장화를 신고 골목 산책을 나섰다.

치킨집의 고소한 냄새가 저기압의 골목을 접수하고 있었다.

우의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가는 아저씨,

한 손에 여분의 우산을 들고 누구를 마중 나가는 여학생,

우산을 버려둔 채 비를 맞으며 텃밭에 들깻모를 한다는 할머니,

마트에서 무거운 비닐 두자루를 들고 찢어진 우산을 쓰고 가는 아줌마를 지나니

대문이 열린 조그만 꽃밭에서 백합의 하얀 향기가 흘러나왔다.

하염없이 비가 올 때 비를 감상하기로는

지붕 밑에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느 해 휴가 때 장맛비를 미황사에서 만났다.

대웅보전 높은 기왓골에서

끈임없이 떨어지는 추녓물 소리를 하염없이 들은 적 있다.

낙숫물이 떨어지는 곳엔 조그만 절구 같이 흙이 파져 있는 법이다.

빗물방울들이 모이고 몸을 섞어 줄기져 내리는 불연속적인 불협화음이

계속된 응시 속에 나의 망막에서 춤이 되어 살아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한의 음악으로 흘렀다.

어제와 오늘이,

나의 집과 절이,

나와 비가 분자로 분화되어 간극 없이 서로 녹아들어 한 몸으로 흐르는듯 했다.

느낌을 따라가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약간은 사치스런 생각으로 빗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은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뭔가 손에 쥘 것 같아도 결국 놓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모든 것은 구름같이 흩어지다 모이고,

물과 같이 흐르다,

바람같이 사라질 것이니까.

처한 데마다 자기가 제 주인이 되기란 어려운 것 같다.

 

이렇게 비오는 날은 망연히 낙숫물 소리를 듣거나,

불어난 몸짓으로 거만하게 흘러가는 도랑물을 무연히 바라보는 것도

여름의 한 가지 낙일 것이다.

오늘도 미황사 처마끝 낙수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송세헌 옥천중앙의원 원장, 시인, 사진작가
송세헌 옥천중앙의원 원장, 시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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