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하나인 것, 색이 없는 것이 여러 가지로 힘을 결합하여 수많은 색들을 의도 없이 지니네.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것이 흩어져 가네. 시초에 그 빛나는 신 그가 우리를 상서로운 지혜로 결합하기 바라네 / 그가 바로 불이네, 그가 태양이네, 그가 바람이네, 그가 달이라네, 그가 바로 태백太白이네, 그가 브라흐만이네, 그가 물이네, 그가 ‘쁘라자빠띠’라네 – 인도의 고대 경전『우파니샤드』11.「스웨따스와따라 우파니샤드」네 번째 장

“의醫는 하나이고, 의학은 여럿이며, 요법은 수천 가지다!”라는 정언이 있다. 이 명제가 참이라면 다음과 같은 언술도 지극히 온당할 것이다. “책은 하나이고, 읽는 방법은 여럿이며, 이해는 수천 가지다!” 종교라는 ‘책’ 역시 그러하다. 물론 신앙과 신학은 여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대물림 신앙이 그대로 평생의 신앙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지만 신학 차원의 공부가 신앙을 촉발하는 경우도 많다. 여하튼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의 독서 행태에서 서양의 오랜 성전聖典 점치기, 혹은 개전開典 ‘점보기’가 잦아졌다.

중국에서 ‘권복卷卜: 책 점보기’라고 부르는 그것은 별거 아니다. 어느 종교의 경전이든 선새벽에 눈길과 손길 가는 데로 찾아 펼치고 읽는다. 이를테면 어릴 적 여럿이 한 책을 돌려가며 펼쳐서 도판에 등장하는 사람 수가 많으면 이기는 식이다. 모두 긴장하는 가운데 큰 그림에 32pt 글자가 박힌 동화책을 열어 젖혀본 기억이 있는가? 인간의 유전자에 학습DNA는 존재하지 않아 그 누구나 저마다 배우고 깨쳐야 한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세세손손 읽고, 해독하고, 강론했지만 늘 새로운 경구들. 나의 머리맡에는『성경』,『시경』,『우파니샤드』,『산해경』,『도덕경』,『논어』등속의 경전류가 놓여 있다.

2020년 6월 21일- 윤사월이 다 가고 음력 오월 초하루에 하지였다. 한 계절에 6개씩 보름마다 드는 24절기의 하지는 동지와 짝패이다. 밤이 가장 긴 그 날부터 시작한 낮이 연중에 가장 긴 날인데 부분일식이 예고되었었다. 나날이 그렇듯 인시에 깨어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러고 중국 송대 도연명(365-427)의 시집에서 찾은 시구 10자를 하지송夏至頌으로 쓰고, 되새겼다. 심념상오생甚念傷吾生 정의위운거正宜委運去-

「신석神釋: 정신의 풀이」에 보이는 시구인데 “심한 염려는 자신의 삶을 해치니, 진정 자연의 운행에 맡기며 살아가야 하리”로 풀어진다. 오류선생은 41살에 늦게 얻은 관직을 버리고 누나의 죽음을 핑계삼아 귀향했다. 그러고 자연에 의탁해 밭을 일구며 깊은 상념 속에 저 유명한「귀원전거歸園田居: 귀향해 전원에 기거함」,「음주飮酒: 술을 마시고」,「독산해경讀山海經:『산해경』을 읽고」등의 연작시를 남겨 중국시단의 최고봉에 올랐다.

동진에서 송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원량. 그의 전통적 유가와 도가의 사상적 진수를 풀어낸 시편들은 참된 자아를 찾는 일상적 삶의 반영이었다. 앞의 시「신석」은「형영신形影神: 몸과 그림자, 정신」을 시제로 쓴 3수의 연작 중 마지막 에 나오는데 전편은 인간적 원량을 이해하는 또는 본받기를 작정한 이들의 관건이 되는 시이다. 몸과 정신 부리는 한뉘에서 짜장 그림자 그 후대의 엄연한 평가를 떨칠 수 없는 지금, 여기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붓을 헹구고, 파지를 정리하고, 서재의 불을 끄고 갓밝이 산책에 나서면서 벽시계를 보니 5시였다. 묘시가 시작되는 그 시각은 오야五夜가 끝나는 시간이다. 하룻밤은 해질녘 저녁 7시부터 2시간씩 5등분 해서 각각 초-이-삼-사-오 경으로 불렀다. 갑-을-병-정-무에 야를 붙여도 같은 시간이다. 그러니까 사경은 정야가 되는 것. 아무튼 한겨울이면 사위가 칠흑이겠지만 동쪽 하늘이 희번하고 새들이 날고 있었다. 여름철 새똥이 붉어지면 앵두나 오디, 보리수가 다 익었다고 했던가? 대문가 촉규화 그 접시꽃의 마중을 받으며 귀가해 예의『우파니샤드』로 책 점보기를 했다.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두 마리 새가 함께 어울려 나타나 같은 나무에 깃드네. 두 마리 가운데 하나는 열매를 맛있게 먹고, 다른 하나는 먹지 않으며 바라만 보네 / 몰두하는 인아人我는 같은 나무에서 하릴없이 미혹되어 슬퍼하네. 이와는 다른 흠모하는 주인과 이의 위력을 보면 슬픔을 여의게 되네. -『우파니샤드』11.「스웨따스와따라 우파니샤드」네 번째 장

인간은 사람과 자연에게서만 배우는 법. 나이가 성숙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자고로 철을 모르면 애나 어른이나 여전히 철부지라는 지청구를 듣는다. 여기에서 사람의 입말과 글말을 익혀 나가면 어느 정도 지식적 철이 깨쳐진다. 그러나 자연의 그것은 부단히 관측하고 체감해야 깜냥껏 지력이 튼실해진다. 어떻게 보면 사람 한 살이는 ‘3력’을 쟁취하고, 다시 내려놓는 그 순환이 아닌가 싶다. 학력과 재력, 체력- 이 일습을 다 갖기 위해 애쓰다 다 갖추든지 어느 편이 모자라든지 회두리에는 체력과 지력이 남는다.

나는 한 의사로서, 환자들을 가능할 때마다 정원으로 안내한다. 우리 모두는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이나 끝도 없는 사막을 헤매어본 적이 있고, 강가나 바닷가를 거닐어본 경험이 있으며, 푸르른 산에 올라본 경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짐과 동시에 활력을 되찾고, 정신이 집중되고, 신체와 영혼이 상쾌해지는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나는 40년간 의사 생할을 하면서, 만성 신경병 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비약물치료법을 두 가지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는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정원이었다. - 올리버 색스(2019)『모든 것은 그 자리에: 첫사랑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3부 삶은 계속된다 중「정원이 필요한 이유」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밤낮의 1일을, 달은 대괴를 돌아 1달을, 태양계 세 번째 행성은 해를 크게 선회해 1년을 각각 만든다. 해와 달, 지구- 천지인을 삼재라 부르거늘 이는 시간과 공간에 인간을 더한 삼간 우주의 총화이다. 십수 년에 걸쳐 따로 운행하던 이 천체들은 한순간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축하하고 위무한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그 애면글면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말이다. 붙박이 해를 달이 지구 앞에서 어린아이 사과 먹듯 조금씩 베어 무는 게 일식日蝕이다. 역시 지구가 해를 등지면 해가 달을 먹는데 그것이 월식月蝕이다.

경자년 6월 21일 이번에는 오후 3시 반부터 5시까지 달이 해를 반쯤 먹었다. 이제 10년 뒤에나 그 광경이 재현된다. 천하언재- 해와 달 두 새가 깃드는 그 저마다 나무인 사람들. 영원히 말이 없는 자연이지만 육체와 정신 그 두 새 키우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고 있다. 이녁이여! 자신의 살이 베어지든 다른 이들과 부딪히든 부디 몸과 마음 추스르며 잘들 살아 내시게나. 시초의 신들이 머무는 처소- 그 축복의 땅에서 자신의 정원 가꾸면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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