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안록산의 난 이후에 적막한 세상 / 동산과 집 뜰에는 잡초만 무성 / 우리 동네 백여 집 / 세상이 어지러워 각기 동서로 피난 갔네. / 살아남은 사람 소식 없고 / 죽은 사람 흙으로 변해 버렸네. ... 영원한 아픔은 오랫동안 병든 모친 / 오 년의 전란에 돌아가신 일 / 나를 낳아 주셨건만, 힘이 되지 못하였으니 / 모자 두 사람 죽도록 통곡했네. / 세상 살며 이별할 가족도 없는데 / 어떻게 백성 노릇만 하라 하는가! - 두보「무가별無家別: 이별할 가족도 없건만」부분

침울돈좌沈鬱頓挫- 한시하면 언뜻 음풍농월, 유유자적 그런 광경이 떠오른다. 하지만 두보(712-770)의 시는 큰불에 데인 상처를 들쑤시고, 강물에 목덜미가 처박힌 듯 숨이 막힌다. 일찍이 시가 그렇게 읽힌 적이 없었다. 시사詩史- 맹계孟棨의 평처럼 두보는 안록산의 난(755-763)을 “본 것에 미루어 감춰진 것까지 남김없이 서술”하였기 때문에 시사의 조종이 되었다. 역사를 소재로 시를 지었다는 게 아니다. 신실하게 사람들을 살펴서 한 시대의 사료가 된다는 뜻이다. 한 편의 시가 일상이 뒤집혀 울울한 사람들의 그때, 거기를 재현하는 것이다. 시의 본질은 역사라는 시간을 앞질러 가는 법.

전장의 통곡 소리, 아아! 수많은 새 귀신들 / 시름에 겨워 노래하는 외로운 늙은이. // 어지런 구름, 황혼 무렵 낮게 드리우더니 / 세찬 눈보라가 회오리바람에 뛰논다. / 바가지도 버려진 독에는 술도 없고 / 꺼진 화로 붙잡고 발그레한 기운 느껴본다. // 여러 고을에 형제들 소식이 끊겨 / 시름에 주저앉아 허공에 글을 쓴다. - 두보「대설對雪: 눈은 내리건만」전문

당나라 현종대인 755년 10월 두보는 44살에야 낮은 관직을 얻는다. 하지만 그해 11월에 일어난 전란에 휘말려 수도 장안으로 숙종을 알현하러 가다 반군에 잡히고, 탈출해 좌습유 직을 받아 전선에 나서고, 사천성 성도에 머물고, 다시 가족들과 장강의 삼협을 벗어나 악양으로 향하고... 59세를 일기로 그 뱃길에서 생을 마감한다. 시인의 자인 자미子美- 그대로 한 ‘아름다운 아들’의 여정 따라 소재는 다소 변한다. 하지만 개인의 시대와 역사적 불행이 그 본령이어서 훗날 시의 성인- 시성詩聖으로, 작품은 시사가 되었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느냐고 묻는다면「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조지 오웰(1938)『카탈로니아 찬가』제5장

1936년 7월 17일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프랑코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인 에릭 아서 블레어는 34살이던 1937년 12월 영국독립노동자당에서 발행한 신분증을 지참하고 의용군이 된다. 몇몇 전선에서 전투를 치르고, 참전 6개월 무렵 우에스카 진지에서공산주의자들의 총탄을 맞고, 치료받다 영국으로 탈출한다. 전쟁이나 내전, 혁명 그 어느 편으로 부르든 ‘스페인 싸움’은 정치적이었고, 조지 오웰이 필명인 작가는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라는 신념에서 300여 쪽의 르포르타주를 썼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혹시 앞에서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지금 말해 두겠다. 나의 당파적 태도, 사실에 대한 오류, 사건들의 한 귀퉁이만 보았기 때문에 생길 수 밖에 없는 왜곡을 조심하라. 또한 스페인 전쟁의 이 시기를 다룬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똑같이 조심하라. - 조지 오웰(1938)『카탈로니아 찬가』제14장

이런 전제하에 그렇다면 영국인 블레어는 왜 바다 건너 스페인으로 간 것일까? 북부 지방 카탈로니아에서 어떤 경험을 했기에 찬가를 보내는 것일까? 답안은 정치에 무심한 독자들은 빼고 읽어도 좋다는 제5장에 있다. “나는 평등의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순진했다. 대체로 우연 때문에 나는 내가 스페인 노동 계급의 가장 혁명적인 일파 속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장군과 사병, 농민과 의용군은 평등한 자격으로 만나고 있었던 것. 똑같은 보수를 받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없었다. 고용주나 하인 계급도, 거지, 창녀, 변호사, 사제도...

1961년 11월 13일 미국의 백악관- 카잘스는 실내악 연주회를 끝냈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앙코르를 요청했다. 85세의 첼리스트가 활을 잡았다. 그 연주곡은 스페인 카탈로니아의 민요인「새의 노래」였다. 연주가 끝나고 카잘스가 덧붙였다. “이 새가 부르는 노래는 바로 평화, 평화, 평화입니다....” 파블로 카잘스는 카탈로이나 출신으로 13살에 바르셀로나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바흐의「무반주첼로곡」을 직접 연주해 세계적인 음악가 반열에 올랐고, 스페인왕실로부터 훈장을 받을 정도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60살이 되던 해 파시스트 프랑코장군이 내전을 일으키자 당시 집권세력인 공화정 인민정부를 지지했다.

마침내 1938년 10월 고국에서의 연주를 끝으로 추방되었는데 여러 차례 초청했지만 응하지 않았고,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코정권에 우호적인 국가의 연주회도 거부했다. 1973년 10월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프랑코총통이 생존해 그의 유해는 카탈로니아에 묻히지 못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중세도시 바스크에 폭탄을 투하해 1천 5백여 명의 민간인을 몰살시킨 나치의 만행을 그린 피카소의「게르니카」- 1954년 헤밍웨이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장편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그리고 의용군으로 참전한 4만여 명의 이름없는 국제여단- 카잘스는 그 시대의 화신으로 영원히 실아간다.

신은 역사를 바꾸지 못하지만 역사가는 바꾼다 했던가?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역사는 피의 목욕탕”이라고 규정했다. 동양적 표현인 전쟁의 시산혈해屍山血海 바로 그 뜻이다. 카뮈가 더 적확하게 석명했다. “제국과 교회는 화해의 햇살 못 미치는 무덤 아래에서 자라난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기호학자 에코(1932- )는 “전쟁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이 지성의 의무”라면서 인류가 전쟁을 터부로 선언해야 할 본능적인 필요성을 느끼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주창했다.

오늘 우리는 로마의 판결(제2차 세계대전시 로마 근교에서 정치인과 볼모 335명을 학살한 나치 친위대 대위 프립케의 1999년 군사법정의 최종판결. 종신형을 확정하고 가택 연금을 허용) 이후, 참을 수 없는 것을 정의하는 이 결속 능력이 훨씬 더 멀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너무나 멀리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공동책임자임을 발견하는 것(하지만 자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 -움베르토 에코『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전쟁에 대하여 생각하기」,「이주, 관용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것」부분

우리는 역사가의 심정으로 서로 돈독하게 결속하고, 공동책임자임을 자각하고 누구의 조종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호국보훈의 달, 전쟁의 6월을 통해서. 영국 시인 존 던의 시「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지막 시구는 이렇다.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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