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시가지에서 우체통과 공중전화부스를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뭇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지만 전송 수단이 변했기 때문이다. 캐나다 마셜 매클루언(1911-1980)의 주창 대로 인간 감각작용의 연장인 매체- 그 미디어가 진화한 것이다. 모바일 인터넷, 인공지능, 빅 데이터 등 물리학과 생물학, 디지털 기술이 결합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 예측 불가능한 미래지만 휴먼 커넥션- 그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네 번째 변혁이 인간의 행동 양식과 정체성, 윤리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연구과제로 대두되었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 나는 편지 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 안도현(1961- ) 시「바닷가 우체국」부분

시인은 어느 해안의 여관방에서 우체국을 보면서 회억에 잠긴다.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과 맞서서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우체국, 우편물을 받아먹어 도깨비나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닮은 우체통,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을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 시인은 가슴 속의 서찰을 들추며,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소싯적을 떠올린다. 짜장 이제 나는 어디로 부쳐져야 하나? 자신을 수신처로 밤새 육필로 쓴 그 안서雁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

우체국이 정보와 금융의 허브였던 시대가 있었다. 1960, 70년대 그 창구에는 장거리 시외전화를 걸거나 전보를 치고, 소포를 부치고, 예금통장을 든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직원들은 문맹의 방문객들을 위해 주소를 대신 적어주고, 글자 하나씩 돈푼이 늘어나는 전보는 ‘부사망급래요망’처럼 축약을 거듭했었다. 제철 토산품들이 발신자의 아량으로 석양에 돌아온 우체부들의 허기를 채우던 시절- 보내기도, 받기도 힘들던 그 지리적 거리가 오히려 진정 심리적 거리를 깊디깊게 했다. 이제 삶의 본령인 그 작고, 느리고, 낮게 사는 참맛을 잃어버렸다, 죄다.

눈동자 / 하나의 / 보람을 / 잊지 않기 위해 // 또 / 하나의 / 눈동자와 / 닮아져간다. - 조병무(1937- ) 시「편지」전문

척독尺牘-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편지는 30cm 남짓한 길이의 나무나 헝겊에 친필로 일일이 썼다. 그런 연유에 길이를 재는 한자 ‘척’이 들어갔다. 유협(중국 남조. 465-521)은『문심조룡』에서 서간書簡을 다음과 같이 석명했다. “그 근본은 흉회: 가슴에 품은 뜻을 펼쳐내는 데 있으며, 위축된 의기를 발산하여 자신의 사람됨을 탁언託言: 말에 기대어 드러낸다. 그러므로 더러움을 씻어 없애고, 정신의 활동에 맡겨 부드러운 기분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때문에 “문장의 여러 가지 지류가 서간에 모이는데 금빛 모습을 번뜩거리면서도 또 소박한 양상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조시인의「편지」는 단 2연 8행에 ‘척독’의 본새를 더덜없이 새겼다.

병석의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 천리의 먼 곳에서 그 마음을 담았구려 /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고 /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 써보았네 / 바라노니 아버지와 어머니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 평생토록 가슴 속에 새겨두거라 – 정약용(1762-1836) 한시「하피첩霞帔帖」

1810년의 초가을. 34년 전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받는다. 경기도 양주 마재에서 보낸 그 붉은빛 바랜 담황빛 다섯 폭의 활옷- 다산은 등잔불 심지 돋우고 재단해 서첩을 만든다. 그리고 노을의 해거름녘에 먹을 갈고 붓을 든다. 훗날 이를 보면 어버이 그리워하는 감흥이 새록거릴 터. 전남 강진군 만덕리 귤동의 다산초암草庵에서 고향의 처자식이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유배지에서 구하기 어려운 종이를 염려한 것일까? 초례청의 활옷을 보낸 뜻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편지지로 쓸 요량을 했을까? 18년의 유배가 풀려 18년 더 살아내다가 1836년 75세로 영면한 정약용- 180여 년이 흘렀지만 모친의 치마폭에 눌러쓴 부친의 가족 사랑이 무한히 생생하다.

유협의 언술 그대로 ‘소박한 치마에 금빛처럼 새겨진 예지’의 척독- 편지글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흉회 그 햇살 못 미치는 가슴속 심연의 뜻이 광채처럼 빛나는 글로 드러나는 것 말이다. 왼쪽 눈동자에 비추는 글이 오른쪽 눈동자가 오롯이 읽어내듯 진심어린 서한- 그 편지를 받은 이 역시 글 쓴 자의 눈동자 마주하듯 읽는다. 그래서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은 마음의 그림’이라는 말이 전해지는 모양이다.

내가 집에 함께 있으면서 너희들을 가르쳤는데도 듣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다른 집안에서도 혹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멀리 귀양살이 와 풍토병이 심한 남쪽 변방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외롭고 불쌍하게 지내면서 밤낮으로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고 마음 속에 담긴 뜨거운 마음을 쏟아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너희들은 이것을 한번 얼핏 읽어보고 고리짝 속에 처넣고는 다시는 마음에 두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 박석무 편역『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96쪽「사대부가 살아가는 도리」

살천스럽게 몰아붙이는 편지를 읽으며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은 얼마나 반성했을까? 그러나 남겨진 60여 편이 매양 질책은 아니었다. 귀양에 처한 폐족이지만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북돋아 준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 가슴 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실로 현자, 대인다운 다산의 풍모가 여실하다.

코로나 19로 자가 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시대- 유배와 유폐지 못지않은 그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거처는 그래도 ‘집’이다. 피붙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 요즘에 다산의 편지는 큰 울림으로 저마다 성찰하게 한다. 어버이, 자식 사이에 속내 담긴 편지 한 통 주고받은 적이 있는가? 식탁에서도 자녀들은 카톡으로 대화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핸드폰을 검색한다는 세태- 굳이 CVOVID-19가 아니더라도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나라의 고민을 연구한 책이 속속 출판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책 한 권을 소개하며 매조지 한다, 다산의 ‘잔소리’처럼 들릴 이 글을.

저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미래의 이슈들을 다루기 위해 편지글의 형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직관에 반하고 다소 이상한, 심지어 시대착오적인 구식일 수 있지요. 편지는 뇌를 일시 정지 상태로 이끕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함께 생각해볼 수 있지요. 편지는 아무리 다급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표현하기 힘든 가벼움과 연결성이 내포되어,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대화를 위한 기초가 되어줍니다. 덕분에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디지털시대의 다중적인 성취들에 수반되는 인지적, 감성적 변화에 대한 최선의 보완물이자 해독제가 될 것입니다. - 매리언 울프『다시 책으로 Reader Come Home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첫 번째 편지: 읽기, 정신의 카나리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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