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5월의 꽃- 그 침묵의 열매를 위한 진혼곡
[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5월의 꽃- 그 침묵의 열매를 위한 진혼곡
  • 김래호 작가
  • 승인 2020.05.1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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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팡세』에서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을 토로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음악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악보에 없다.”고 단정했다.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1866-1944)는 캔버스를 “차갑고 파괴할 수 없는 벽처럼 무한히 이어지는 거대한 침묵”에 비유했다. 루이 라벨(1883-1951)은 신실재론을 주창하면서 정언했다. “인간의 말은 짐승의 무언無言과 신의 침묵沈默 사이에 있다.” 

철학자와 음악과 미술, 문학 등 예술가들은 침묵을 깨뜨리는 야장冶匠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소리와 빛깔, 글말’을 주조해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현시하고, 그 유한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요한 호이징가(1872-1945)는『중세의 가을』에서 “매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고 규정했다. 그렇다. 대장장이들은 누구보다 먼저 시대의 흔적을 살펴, 용서와 화해의 용광로에 용해시킨다. 결코 식지 않는 가슴 속의 불가마들- 

오랫동안, 철규는 카메라 밖을 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이 너무 단단해서, 뭐라고 말을 붙여볼 수조차 없는 그럼 침묵이었다. 오랜 침묵 뒤에 소년 철규는 카메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 영화가 소년 철규의 그 오랜 침묵 끝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사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조용했다. - 공선옥「은주의 영화」(2016년「창작과 비평」봄호) 마지막 문단

이 중편소설을 포함한 8편의 소설집『은주의 영화』(창비, 2019년)가 올해 ‘5.18 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심사위원회 심사평은 공작가(1963- ) 글쓰기의 맥을 적확하게 짚었다. “광주의 이야기들 속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찾아내 드디어 시간과 공간을 함께 아우른 불길을 만들었다.” 며, “1980년에 머물러 있지도 않고, 광주의 죽음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은 5.18 문학의 진짜 모습이 담겼다.” 고 평한 것이다. 소년 철규의 그 오랜 침묵 끝으로 시작된 은주의 영화- 

카메라가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카메라가 숨을 쉰다. 카메라가 큰 숨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카메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카메라 속에서 카메라를 찾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카메라 속에서는 카메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카메라 속에서는 내가 카메라이고 카메라가 이모다. 나는 이제 이모가 되었다.( 앞의 소설집 83쪽)

니가 와서 처음으로 옛날 이야기를 쏟아놓고 났더니 그 뒤로 그렇게 잠이 잘 온다- 도서관학과를 졸업한 영화감독 지망생 오은주는 외할아버지 제사에 엄마를 대신해 참석한다. 그날 이모의 고향에서의 사춘기 시절, 기억에도 없는 이모와 동거 때의 옆방 한 아이와 얽힌 ‘사실’을 듣게 된다. 카메라에 담긴 ‘자술서’를 수차례 반복해 보고, 들으면서 은주는 ‘일가의 광주’를 이해하게 된다. 상희 이모가 다리를 절게 된 사건, 외삼촌의 보양집 일을 돕다가 광주에서 대구탕집을 하게 된 내력, 집을 나간 엄마 이상순을 찾는 경찰 아버지 오중철...   

사회적 고통은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권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 비롯되는데, 이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이들 권력이 대응하는 방식은 또다시 사회적 고통을 야기한다. 사회적 고통의 범주에는 보통 각 영역으로 나누어지는 상황들이 포함되는데, 이 상황들은 건강, 복지, 법률, 도덕, 종교 등에 관한 쟁점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 상황들은 기존의 범주를 뒤흔든다. - 아서 클라이만(2002)『사회적 고통Social Suffering』서문 

이모가 17살, 엄마가 15살이던 1980년 5월의 그날- 퇴각하던 진압군들이 들이닥쳐 마당의 장독을 깨고, 닭과 개한테 총질을 해대었다. 달구들은 살점이 너덜너덜한 도망쳤고, 군인들은 개처럼 자매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순간 이모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고, 엄마는 도둑질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외삼촌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 닭만 죽은지 아냐, 바보야, 우리 장꽝만 깨진지 아냐, 멍청아.“(앞의 책 91쪽) 그렇게 시대적 광기의 폭력에서 개인적 고통은 발아되었고, 지울 수 없는 일생의 트라우마로 각인되었다. 

사르트르는 ”모든 작가들은 소설의 독서에 수반되는 이미지의 빈곤을 주목하고 있다!“ 고 제기했다. 정신적 이미지가 아니라 진정 소설 자체에 매혹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다. 하지만 사진의 진화물인 영화는 ‘실증’ 그 핍진성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특히 플레허티의 말대로 ‘폭로의 예술’인 다큐멘터리 영화는 진실에 대한 충동을 진작, 현실에 대한 공감과 참여의식을 격양시킨다. 그리어슨이 말한 ‘현실의 창조적 해석’을 통해서 말이다. 숱한 다큐 영화들이 ‘사회적 고통’을 폭로했으며, 여전히 끝없는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엄마가 나 버리고 갔을 때 이모가 할아버지 병원에 죽 갖다주러 가는 동안 애가 나를 봐줬다네. 봐봐, 저기 애가 나오네, 엄마 나 잠깐 저 속에 들어갔다 올게. 엄마, 울지 말고 잘 있어, 나는 카메라고 카메라는 저기 나오는 저 애야이. / 울지 말라고 했건만, 카메라 밖에서 엄마가 울다가 악을 쓴다. 미친 가시내야, 아니 은주야,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카메라 밖으로 나오너라. / 카메라 속 아이가 잠들고 나서야 나는 카메라 밖으로 나왔다. 나는 다시 은주가 되었다.(앞의 소설집 100쪽) 

‘1. 상희’에 이은 두 번째 에피소드는 ‘2. 철규’이다. 우물집에 함께 세 들어 살다가 호프집을 차린 박선자의 아들이다. 박철규군은 1989년 5월 3일 22시경에 광주시 청옥동 제4수원지 부근 야산에서 단순 추락사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엄마가 의사와 검사의 사인이 있는 서류를 들고 경찰서를 나오는데, 시내에서 학생들이 철규를 살려내라고 데모를 한다. 철규를 왜, 우리 철규를 당신들이 아는가. 울던 대학생들이 묻는다. ”이철규 누나냐고? 아니라고, 나는 박철규 에미라고 했지.“(앞의 소설집 129쪽)

11살의 아들에게 삼천원을 쥐어주고 꽃놀이 가서 지랄 발광한 에미가 카메라 앞에서 운다. 집과 학교에서 겉돌던 소년은 산속 동굴 속에 자신의 ’방‘을 마련하고 즐겨 찾는다. 5월의 그날 밤 대학생 이철규를 찾던 불빛에 몰려 철규는 방을 나선다. 박선자가 울부짖는다. 내가 인자사 너를 불러본다. 내 아들 철규야. 말은 솔직하니 다 해서 시원은 하다마는, 너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사무치는구나, ”야야, 저어기 노랑나비 봐라, 봄은 봄인갑다, 노랑나비가 날아가네, 노랑나비가.“ 초로의 두 여인이 노랑나비를 쫓는 그 순간을 은주는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스스로 나비가 되었으므로...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한강 장편소설『소년이 온다』(창비, 2014년) 213쪽  

1980년- 꼭 40년 전 나는 21살 지방의 국립대 국문과 대학생이었다. 그해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자가 되었고, ’서울의 봄‘ 3월에 부활한 총학생회 문예부장이었고, 4월에 ’훌라 송‘을 불렀고, 그리고 5월에 ’광주‘를 귀동냥했었다. 그로부터 9년 뒤의 5월, ’이철규 변사사건‘을 역시 들었었다. 당시 나는 M방송사 2년 차 PD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이순을 넘어선 나이-「은주의 영화」속에서 ’새로운 과거‘를 회상하는 5월을 맞는다. 글을 매조지 하려는데 누군가 나의 손을 잡으며 자판을 두드린다.

나는 마침내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가져본다. 그런 국가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고 또 이 열매가 익는 대로 떨어지게 허락해주는 국가는, 그보다 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 내가 상상만 했지 결코 보지는 못한 그런 국가가 탄생하도록 길을 열어 줄 것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1849)「시민의 불복종」마지막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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