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 장병 교육자료 :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제공)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 뉴스티앤티

대남 적화 통일의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북괴는 무력남침의 호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1965년부터 단계적으로 무장간첩을 전후방에 침투시켜 중요시설 파괴와 요인암살을 획책하는 등 민심을 교란시키고 대한민국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데 총역량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북괴의 대남전술은 1966년도 정찰단계를 거쳐 1967년도에는 행동단계로 옮겨 전방지역에서의 빈번한 도발행위와 아울러 후방지역에 무장간첩의 직접적인 대량침투를 획책하더니 1968년에 들어서자 급기야 청와대 기습사건인 1·21사태와 11월 1일 울진 삼척 및 서해안 지역에 130여 명의 무장간첩을 동시에 침투시켜 선량한 주민, 학생, 어린이까지도 무차별 학살하는 등 그 만행이 극에 달했다. 이에 따라 우리 군은 대비정규전에 관한 작전 통제권을 유엔사로부터 인수하고,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는 등 본격적인 대간첩 작전을 수행, 많은 시련과 함께 산 교훈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 무렵인 1968년 11월 서산지역에 침투한 무장간첩 섬멸작전에서 오직 부대와 임무만을 위해 일해 왔던 청년장교 이진삼 소령(제28대 육군참모총장)이 멸사 보국의 결사 정신으로 무장간첩 2명(임관재, 박일근)에게 15m까지 포복으로 육박, 단발의 수류탄으로 사살시킨 전례는 실전경험을 하지 못한 오늘을 사는 우리 장병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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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1일(금) 06:55에 북괴 노동당연락부 소속 무장 간첩 2명이 충남 서산군 지곡면 부산리 해안으로 침투하여 해미면 가야산 방향으로 이동 하던 중,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BR 720798) 앞 노상에 이르러 때마침 술심부름을 가던 이 마을 소년 박청운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른 아침에 바지 끝이 젖어 있는 작업복과 농구화 차림에 배낭을 메고 칼빈 소총까지 휴대한 정체불명의 괴한들과 만난 박청운은 순간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무장괴한들의 곁을 지나려 하자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며 험한 인상을 한 괴청년은 박청운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집안 어른 심부름으로 저 아래 마을로 술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라고 답하자 등을 돌려 먼 곳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던 나이 들어 보이는 다른 무장괴한이 “너 이 근처에서 무장한 군인들을 못 보았느냐?”하고 다시 물었다.

“못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이들은 다시 한 번 박청운의 위아래를 찬찬히 훑어보며 술병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그럼 빨리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서둘러 술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이들의 낯선 복장과 태도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의 1·21사태 등 무장공비 침투 만행 소식과 선생님과 국군 아저씨들로부터 거동 수상자 신고 교육을 받아 온 터라 순간적으로 “무장간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박청운의 이런 생각은 귀가를 서두르는 걸음마다 더욱 확고해져서 곧바로 이웃 마을에 있는 성연지서로 달려가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과 수상한 사람의 인상착의(작업복 상하, 농구화 착용, 배낭을 메고 칼빈 소총 휴대) 등을 신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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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를 접수한 성연지서에서는 08:22에 제51사단 전투대대 1중대에 거수자 출현 신고 내용을 전파하였으나 현지에서는 시기적으로 보아 사냥 계절로 사냥꾼일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간단히 종결지어버리려던 중, 507대공과에서 신고를 접수한 이진삼 소령(32세)은 하찮은 신고 하나라도 소홀히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는 평소의 소신대로 신고를 받은 즉시 L-19기로 대전 공군 비행장으로부터 이륙, 홍성 간이비행장에 도착하여 대기시켜둔 차량으로 서산을 경유하여 최초로 신고된 현장에 도착하였다.

현지 정보 분석조는 사냥꾼일 것이라는 분석결과를 보고 하였으나, 이진삼 소령은 상황을 예리하게 분석 후 무장간첩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끈질긴 집념으로 원점 일대로부터 다시 수색작전을 실시한 결과 15:10에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갈대밭(BR730788)에서 괴한이 유기한 것으로 보이는 장비 즉, 배낭 2, 무전기 1, 트랜지스터 라디오 1, 쌍안경 1, 서산 지도 2, 신사복 1, 잠바 2, 현금 5천 원, 전남 도민증 1, 서울 시민증 1, 불온 문서 9, 명함 40, 칼빈 실탄 116, 여자사진 1, 가족사진 1 등 63점의 유기물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무장간첩 출현을 확인하고 즉각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본격적인 수색 작전에 들어갔다.

무장간첩이 휴대했던 유기물을 확인한 이진삼 소령은 17:30에 성연지서로 가서 경비 전화로 제51사단장 신건선 준장에게 “성환에 위치한 제53탄약창 병력과 예비군으로 온양-당진 도로를 차단하고 전투 1개 대대를 투입, 당진-서산 도로 일대를 수색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함으로써 원점을 중심으로 한 포위망 형성과 함께 수색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내륙작전을 위한 봉쇄선 형성과 아울러 해상 도주로 차단을 위해 경비정 6척을 해상에 배치하여 순찰 및 경계활동을 주도면밀하게 실시하는 한편, 다음 날인 11월 2일 11:30에는 항공기를 이용하여 무장간첩들의 예상 도주로상에 자수 권고 전단 8,000매를 살포하는 등 지상, 해상, 공중의 입체적인 작전이 확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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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이 계속되던 11월 3일 08:30에 서산군 해미면 삼송리에 사는 최정환 씨 집(BR805725)에 무장간첩 2명이 출현하여 최정환 씨 처 진정희(39세)에게 아침식사를 요구하므로 밥상을 차려주자 허겁지겁 취식을 한 후 가야산 기슭(BR855719)으로 도주했다는 신고가 작전부대에 접수되었다.

이러한 세부적이고 정확한 최신 상황을 접수한 이진삼 소령은 09:50에 현장에 도착 작전병력을 재배치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판단하고 즉시 지프차로 현장에 도착된 소병민 소령과 전인철 상사 및 전용주 하사를 가야산 방향 남쪽 능선(BR845716)으로 전개시켜 적을 감시 및 퇴로를 차단토록 하는 한편, 이진삼 소령 자신은 남상일 대위와 김태용 상병을 대동하고 210고지(BR845718)를 향하여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은밀하게 적을 추적하였다.

한편, 소병민 소령 조는 무장간첩이 위치한 210고지 정상으로부터 150m 떨어진 고지에서 소 소령이 중앙, 전인철 상사가 우, 전용주 하사가 좌측에 위치하여 적을 감시 및 차단하고 있었는데 우측에 있던 전 상사가 갑자기 “대장님! 위험합니다. 엎드리시죠!”라고 소리치자 소 소령이 “뭐라고?”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땅!”하는 소리와 함께 무장간첩이 쏜 흉탄에 맞아 소 소령이 전사하였다. 이때, 전 상사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소 소령이 전사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이진삼 소령은 “즉시 소 소령을 긴급히 후송하라”고 지시한 후 210고지 방향으로 무장간첩을 계속 추적하였다.

고지정상 150m 전방에 이르렀을 때 무장간첩의 집중사격을 받은 이진삼 소령은 즉각 칼빈 소총으로 응사하면서 적이 위치한 210고지 우측 은폐된 소로를 따라 정상 30m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갑자기 예기치 못한 무장간첩의 기습적인 권총사격을 받게 되자 10m 아래 움푹 팬 곳으로 몸을 던져 엄폐한 후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비장한 각오로 다시 고지정상 20m까지 전진 사격을 하도록 지시하고 20m 우회하여 그들 후방에서 수류탄 2발을 던져 210 고지 정상에 있는 공비를 11:20분에 2명 모두 소탕하였다.

결국 이진삼 소령이 던진 한 발의 수류탄에 고지 정상 호 속에 숨어 있던 2명의 무장간첩이 동시에 사살되는 전과를 올리고 작전은 종결되었다.(1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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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의 수류탄으로 사살된 2명의 무장간첩은 호 속에서 서로 발을 묶어 놓고 죽은 채 쓰러져 있었으며 개인호 주위에는 수류탄 8발을 가지런히 쌓아 두는 등 결사적인 대항을 하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사살된 시체 주위에 부비트랩이 있는지 몰라 끈으로 끌어당겨보니 이상이 없어 인접 마을에서 들것을 가져와 아래로 운반시켰다. 상황이 끝나고 숨을 돌린 후 김태용 상병의 철모를 보니, 철모가 총에 맞았으나 구멍은 뚫리지 않은 상태였으며 사살된 무장간첩과 함께 발견된 장비는 칼빈 2(탄창 2, 실탄 110), 수류탄 8, 권총 2(탄창 4, 실탄 121), 한화 51,110원, 수첩 2, 나침의 2, 시계 2, 명함 5, 확대경 1, 기타 의약품 및 일용품 등이었다.

이들 사살된 무장간첩의 신분은 북괴 노동당 연락부 소속 임관재(45세)와 박일근(36세)으로 밝혀졌으며 임관재는 충남 서산국민학교 5학년 중퇴 후 대서소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만능 운동선수에다 특히 씨름을 잘하며 변장술에 능하였다.

청년이 되어 일본군에 입대한 후 남양군도에서 복무하다가 8·15해방과 동시 귀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남로당 박헌영 직계로 서산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악질적인 좌익 활동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검거 시에는 변장술에 능한 데다가 힘이 세고 체격이 우람하여 무술경관 20명이 잠복했다가 급습하여 겨우 체포할 수 있었다.

그 후 형무소 생활을 하던 중 6·25때 북괴군의 서울 진입과 함께 탈옥하여 공산치하에서 서대문 내무서장과 남로당 인천 동구 위원장 및 경인지구 인민군 군사후원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월북 후는 박헌영이 숙청되는 바람에 김일성대학 협동농장에서 농장기사로 일하던 중 당성과 충성심이 강하여 노동당 중앙위원까지 발탁된 후 남파교육을 받고 박일근과 함께 무장간첩이 되어 1968년 11월 1일, 충남 서산 해안으로 침투한 핵심 공산당원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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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을 통하여 얻은 교훈은 무엇보다 신속 정확한 주민신고와 신고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정보 분석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또한 의심나는 상황을 끝까지 추적하는 끈질긴 집념 및 전투의지가 대간첩 작전의 성공요인이라는 점이다.

박청운 군과 전정희 씨의 신속한 무장간첩 출현 신고는 작전을 원점에서부터 조기에 실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신고접수 후 즉각 출동하여 현장을 확인함으로써 작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정확한 상황판단이 가능하였고 사냥철을 맞이하여 무장간첩을 사냥꾼으로 오인하지 않고 의심나는 점을 끝까지 추적 확인하는 끈질긴 집념이 안이하게 종결되려던 상황을 실제 무장간첩이 출현한 작전으로 신속히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임무를 위해서는 목숨을 던져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겠다는 젊은 청년장교의 결사 정신과 과감한 전투행동이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적과 조우 시 신속한 대응으로 기선을 제압, 고착 견제하고 어렵고 위급한 상황하에서도 예리한 상황판단과 지형지물의 적절한 이용으로 침착하게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적을 일격에 격멸시킴은 물론 사살된 후에도 부비트랩 설치 유무를 확인하는 등 용감하고 침착하며 치밀한 군인정신을 그대로 행동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요원은 우발상황에 대비하여 전원 전투요원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위망 밖으로 벗어난 적이 주민신고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을 때 먼 곳에 배치된 병력을 거두어 다시 새로운 현장으로 투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프차로 현장에 먼저 도착된 비전투요원들이 신속하게 직접 수류탄을 들고 적지에 뛰어들어 무장간첩 2명을 격멸시킨 것은 운전병, 행정병, 당번병 할 것 없이 모든 요원에게 전술전기를 숙달시켜 전투요원화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전례인 것이다.

이 작전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섬멸작전의 성공으로 북괴는 대남침투 전술 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후 대규모 무장간첩 침투가 자제되는 경향을 보였다.

정부는 본 작전의 긍정적인 영향을 높이 평가하여 서산 부춘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이진삼 소령과 남상일 대위에게 화랑무공훈장, 김태용 상병에게는 인헌무공훈장을 현지에서 수여하였다.

이렇듯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현지 주민의 거수자 출현신고를 접수하고 이를 예리하게 분석, 판단하여 현장에 뛰어들어 목숨을 내어놓고 지근거리까지 접근, 무장간첩을 완전 섬멸시킨 한 청년장교의 끈질긴 집념과 결사 정신, 그리고 전투기술은 오늘의 우리 세대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장병의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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