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물리학자는 색이 측정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색깔은 태양에서 출발해 우리에게 날아온 빛의 파장이니, 빛 실험을 통해 파장으로 색깔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괴테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색은 존재하지 않는 색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1810년에 출간한 『색채론』에서 “빨간 드레스는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을 때 더 붉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색은 지각될 때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눈, 또는 동물의 눈이 없으면 색도 없는 것입니다. 색을 만드는 것은 ‘우리’, 그리고 ’사회‘입니다. - 미셸 파스투로, 도미니크 시모네(2015) 대담집『색의 인문학』

우편번호가 당신의 건강상태를 결정한다- 미국 뉴욕타임즈NYT는 지난 달 27일 4개월여 만에 ’신新 카스트‘가 백일하에 드러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도처럼 COVID–19에 대응하는 계층 간의 민낯이 돌출되었다는 분석이다.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심의 아파트를 떠나 휴양지나 교외별장으로 피신하는 상류층, 재택근무를 하면서 온라인 스트리밍과 배달 서비스를 받는 중산층들,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며 대중교통으로 직업전선을 오가는 저소득층의 일상이 여과 없이 노정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녁이여! 특히 1959년생인 나를 포함한 베이비 부머들이여! 2020년 상반기 코로나 19의 지루한 ’생중계 방송‘ 그 시간을 무탈하게 나고 계신가 안부를 묻는다. 4월 19일 곡우- 봄철 6개의 마지막 절기도 지나고, 이제 5월 5일 입하- 여름의 문턱에 다다랐다. 질본, 확진자, 감염예방 선별소, 언택트, 사회적 물리적 거리 두기, 공적 마스크, 집콕과 방콕의 홈코노미, 온라인 개학, 에듀테크... 새로운 유행어를 배우고 익히느라 봄을 진정 볼 사이가 없었다. 춘하추동이라고 쓰고 ’볼열갈결‘로 새겨온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실 사람들은 ’빛깔과 색깔‘을 동의어라는 틀에서 살아가며, 봄은 저 순백의 설원과 얼음이 녹고 저마다 제 색조를 되찾는 계절로 여겨왔다. 그래서 봄이면 들과 산으로 새뜻한 꽃과 초목을 마중하러 들꾀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처럼 행락이 멈춘 그때, 거기의 뉴턴(1642-1727)은 프리즘 실험, 유리로 된 삼각기둥으로 빛을 관찰했고, 그 결과 빛 속에 색이 있다고 주창했다. 색은 빛의 고유한 속성이었던 것. 나아가 ’사과가 떨어지는 만유인력과 세 가지 운동법칙‘에 대한 연구를 전개시켰다. 이런 성과를 당대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는 이렇게 묘사했다.

자연법칙들은 어둠에 있었네. / 그때에 신이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다니던 23살의 청년과학도 아이작 뉴턴- 그는 1665-66년 런던을 휩쓴 페스트를 피해 링컨셔의 작은 마을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런던 인구의 16%인 7만 5천여 명이 죽어 나가는 참담한 현실에서 뉴턴은 깊은 생각과 숙고를 거듭했다. 마침내 문명사적 3대 창안이라는 빛의 신비와 만유인력, 그리고 미적분이 태어났다. 과학계에서는 라틴어로 ’아누스 미라빌리스: 기적의 해‘로 부른다. 과연 21세기 코로나 19는 뉴턴 같은 학문적 성과는 물론 자아 성찰의 A.C(After Corona) 시대를 열 것인가?

대저 육경六經이란 옛 성왕의 낡은 자취일 뿐 어찌 그 자취를 만들어 낸 근원적인 것 곧 성왕의 생생한 정신이나 행동이겠소.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 역시 그런 발자취이오. 저 발자취는 신에게서 생기는데 어찌 발자취가 신이 되겠소. 백로는 암수가 서로 쳐다보며 눈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잉태하게 되오. 벌레는 수놈이 바람 부는 쪽에서 울면 암놈이 바람받이 쪽에서 응답하여 잉태하오. 같은 종류끼리는 저절로 암수가 교배되므로 잉태하게 것이라오. -『장자』제14장「천운」

사람은 사람과 자연에게서만 배운다. 여기에서 ‘사람’의 공부는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멈추게 된다. 그러나 ‘자연’은 일생의 선생이자 배움터이다. 그 어느 편이든 학습은 난해한 문제와 직면하기 마련인데 억지로 해득하려고 달려들면 종종 곡해에 빠진다. 유전되지 않는 ‘경험’이 풀어주는 것도 부지기수이며, 의문을 품은 채 유명을 달리하는 명제도 수두룩하다. 특히 평생 독서의 저본, 고전 중의 경전류가 그렇다.

이불해해지以不解解之- 출전이 불명확하지만 이 다섯 글자를 잊지 않고 있다. “풀리지 않는 것으로써 이를 푼다!” 옛사람들도 배우고 익히는 일이 살아생전 내내의 과업임을 잘 알아 이런 말을 남긴 것이리라. 불현듯 문심혜두가 뚫리면 무릎을 치거나, 이마를 짚고, 고개를 끄덕일 터. 단박에 해득하려 들지 말고 마음에 품어두어라.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며, 궁리하고 기록하다 보면 마침내 깨치는 날이 오리라. 그런 뜻에서 다섯 자를 전한 것 아니겠는가? 활연대오-

『장자』는 전대 시조들의 저작인『논어』와『도덕경』의 주석서이다. 학문과 사상은 후학들의 비판과 심화를 통해 더욱 견고해지고 분화되는 법. 내와 외, 잡편의『장자』총 33장은 도교와 유교의 요체를 곳곳에서 풍부하게 석명하고 있다. 특히「천운」의 16절은 사실 여부를 떠나 양대 태두의 상면은 압권이다. 공구가 “시.서.예.악.역.춘추의 육경을 오랜 시간 배우고, 72나라 제후에게 써주기를 바랐지만 거절당했다.” 고백했다. 그러자 노자가 “다행이었소. 당신이 세상을 잘 다스리는 군주를 못 만난 것은!” 라며 다음과 같이 일렀다.

참된 도의 작용이란 이런 거요. 자연 그대로의 본성은 옮길 수가 없고,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가 없으며, 시간의 흐름은 멈출 수가 없고, 도의 작용이란 막을 수가 없소. 만약 이 도를 터득할 수 있다면 저절로 되지 않는 일이 없지만, 그것을 놓쳐버리면 저절로 되는 일이란 없는 법이오. 공자는 석 달 동안 집에 들어앉은 채 나오지 않고 있다가, 다시 노자를 찾아갔다. -『장자』제14장「천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정언이 온당하다면 ‘존재는 언어의 집’도 성립된다. 이런 면에서 ‘우주’라는 낱말이 예사롭지 않다. “사방과 상하를 일러 우宇라 하고, 옛날의 지나간 것과 현재의 오는 것을 일러 주宙라고 한다.”(『회남자』) 이런 뜻의 우宇와 주宙는 모두 집을 뜻하는 말이다. 무한한 씨줄과 날줄의 그 시간과 공간이 짜는 존재의 집- 도가의 관점에서 유가는 사고의 ‘집’에 갇혀 또 다른 우주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아집과 고집, 편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말한다. 저도 도를 터득했다 여깁니다. 까막까치는 알을 까서 키우고, 물고기는 거품을 붙여서 키우며, 벌 종류는 누에를 갖다 키웁니다. 사람은 동생이 생기면 젖을 못 먹게 되어 형이 웁니다. 참된 도란 이런 게 아닐런지요.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조화와 어울리지 못한 지가 말입니다. 조화와 어울리지 않고 어찌 남을 교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잠자코 듣던 노담이 나지막히 말한다. 됐소, 공구 당신도 도를 터득했소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세상의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실재였고, 그 세상의 밖에는 위협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그것들이 위협적인 이유는 비실재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재의 중심에 집을 갖지 못하면, 거주처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무존재와 비실재적 속에서 스스로가 상실되었다.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집이 세상의 중심인 까닭은 그곳에서 수직과 수평의 선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수직선은 위로는 하늘로 아래로는 땅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다. 수평선은 다른 곳을 향해 가로질러 가는 땅 위의 모든 길을 말한다. - 존 버거(2004)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이제 사람들은 코로나 19를 통해 ‘집’을 새롭게 재발견하게 되었다. 대문 밖의 세상이 전부이고, 집안은 그저 쉬고, 잠자고, 먹는 육체적인 공간으로만 인식해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격리의 칩거와 두문불출을 통해 이제 집의 무한한 정신적 확장성을 체현하게 되었다. 문득 이 글을 마치려는데 엘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내 자판을 두드리며 말곁 한다.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다. 그러나 유한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에 둘러싸여 있다. 삶의 목적은 그 무한을 되도록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다가 답한다. 집이여! 미안하고 고맙다, 자주 너를 두고 떠나 세상의 의미 자체를 해체하고, 어리석은 허구를 좇았던 나를 기다려주어서. 이제야 내 자신이 우주의 집도 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앞으로 사람으로가 아닌 사람답게 사는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어줄 것을 약속한다. 집이 나요, 내가 곧 집이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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