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신속 재판

참고인 자격에서 피의자로 45일 만인 1993년 9월 15일, 서울 서초동 서울형사지법 조○○호. 용기 없는 판사는 거대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확실한 증거도 없으며 증인도 없는 가운데 유죄 판결을 내렸다. 사건 핵심 주범인 박동준 장군은 미국으로, 천성관의 경기고 선배인 한진구 장군은 국내에서 도피한 가운데 판사는 서둘러 내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방청석의 야유와 웅성거림 속에 나를 석방했다. 45일 만에 급하게 재판하고 석방한 것은 의문이다. 도피한 피의자 2명을 조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할 수 있는가. 사건의 핵심 당사자들의 형량에 비해, 증거와 죄가 없는 내게 씌운 죄목은 중죄에 해당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국가에 대해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뭐에 홀리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내게 생길 리가 없었다. ‘한평생 국가를 위해 일한 내게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억울함에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 넘길 수 없었다. 가슴 속 뭔가가 불덩이처럼 치밀어 올랐다. 밤에 잠도 이루지 못했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도 놀라 깨어나 밤을 꼬박 새곤 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뒤척이며 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한 고통을 준 그는 목표를 달성,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 나라에 과연 정의가 있단 말인가!’

1993년 11월, 2심(항소심)에서 충분한 재심 사유를 인정, 판결을 연기했다.

검찰 측은 본 적도 없는 대리 검사를 참석시켜 본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백승목 참고인을 불러 “상급자이기 때문에 말하기가 곤란하지요?”라는 질문을 하고 “예”라는 답변 하나를 듣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방청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백승목은 사령부로부터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고 내게 와서 “공작원이 말썽을 피워 경찰에 있으니 가서 인수해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부대 특성상 예하 부대장들의 임무는 다른 부대와 달리 공작단장의 권한과 책임하에 있다. 사령부에 왔다면 공작단장 한진구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없었던 사령관이 외국에서 지시를 했단 말인가?

2심 판사들은 이 사건을 심리하면서 나의 항소 이유가 충분했다고 여겨 판결을 내리지 않고 판결을 연기했다. 재판을 마치고 나온, 처음 본 체구가 건장한 검사에게 나는 다가가 따지듯 물었다. “세상에 이런 재판이 어디 있나?”는 내 말에 긴장한 검사는 “죄송합니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사라졌다.

 

화병(火病)으로 2번의 위궤양 헬리코박터 수술

수면 부족과 식욕 부진으로 몸이 쇠약해져 미국으로 치료차 떠났다. 뜨거운 뭔가가 있기라도 하듯 속이 타들어갔다. 화병(火病)이 났다. 불덩어리가 있기라도 하듯 속이 타들어갔다. 화병(火病)이 났다. 머리도 어질어질했고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머리가 돌고 화병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항소를 한 상태에서 아내와 나는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병이 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내도 먹지도 못 하고 병에 걸려 체중이 40kg으로 줄었다. UCLA 병원으로 치료를 다녔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감염으로 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되면 나중엔 악성으로 변할 확률이 높아 일단 수술을 하고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복부를 15cm 절개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5일 후 또 한 번의 수술을 해야 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은 위암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더구나 이 균은 위장질환뿐 아니라 다른 질환의 위험도를 높이며 염증 물질이 생겨 온몸을 돌아다닌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은 화병으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의 정도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컸고, 그 화기(火氣)가 위장을 태웠고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의지가 약했다면 나는 죽었을지 모른다. 너무 치욕스럽고 화가 나서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죽고 나면 억울함을 벗어날 길이 없기에 참고 참았다. 살아서 어떡하든 이 치욕스러움을 벗어나기로 했다.

자식으로부터 미국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님, 곧 사면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면을 하려면 항소를 취소하셔야 해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식으로부터 소식을 듣는 순간, 피가 다시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빨리 사면할 수가 없다. 검찰이 주장하는 나의 범죄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눈물이 났다. 억울하고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검찰에선 항소하면 무죄가 될 것 같으니 급히 사면하도록 하여 항소를 취하시키고자 한 것이다. 머리 좋은 검사들이 병 주고 약 준 꼴이다. 나로선 없던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되니 법의 이점을 검찰이 악용한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 공산주의와 싸웠던가. 권력의 노예가 된 그들을 위해 나는 목숨 바쳐 국가를 지켰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화병은 가라앉지 않고 소화제를 먹지 않으면 복통까지 왔다.

“검찰이 당시에 좀 무리했던 것 같다.”라고 당시의 검찰 측 사람들도 입을 모아 얘기했었기에 담당 변호인이었던 김봉환 변호사와 함께 항소해서 무죄까지 끌고 갈 계획이었으나, 미국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고 치료를 하고 있던 터라 “자네들이 알아서 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1995년 8월 15일, 나는 사면을 받았다. 정의롭게 공직생활을 했다. 죄가 있다면 공산주의와 싸운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땅에 맹세하건대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내 할 일을 다 했다. 다만 응어리가 있다면 내 조국과 가족들이다. 죽기 전에 반드시 이 응어리를 풀고야 말겠다. 국가가 반드시 이 응어리를 풀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아내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천성관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사랑하던 아내는 2003년 6월, 췌장암이라는 최악의 진단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4년 6월 10일 오전 8시, 투병하던 아내가 미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왕진 치료를 받는 동안 몇 번이나 쓰러져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고통을 참아냈다. 그러면서도 누굴 붙잡고 살려달란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혼자서 감당해내려 했다. 아내와 나는 병원과 아들 집을 수시로 오가야 했다. 나는 아내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는 자주 친구를 불러 “건강 잘 챙겨야죠.”라며 나를 걱정했다. 마지막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응급조치를 했으나 아내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죽은 아내와 함께 10일 야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빠른 행정처리가 쉽지 않은데 빠르게 협조해준 병원 관계자와 LA 시의원, 하원 의원의 도움으로 6월 12일 오후에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내의 장례식장에 천성관 검사가 나타났다. 영안실 조문을 마치고 천 검사는 내 앞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그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인사 대신 천 검사의 배를 악수했던 주먹으로 내질렀다. 감정을 실어 힘껏 질렀다면 나동그라졌겠지만, 나는 내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대신했다. 천 검사는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고인이 된 아내와 나의 가족에게 고통을 준 장본인으로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사를 주고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천 검사는 이미 사건이 다 끝났다고 여겨 아무렇지 않게 장례식장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무죄’가 ‘무죄’가 될 때까지 끝이 아니다. 천 검사는 사건 내용으로 봐서 항소를 해 무죄를 받아낸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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