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원 박사 / 뉴스티앤티
서준원 박사 / 뉴스티앤티

4월 총선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는 정당들의 비정상적인 행태가 도를 넘고 있다. 마치 패를 갈라 치열하게 싸웠던 조선왕조의 붕당(朋黨)이 떠오른다. 조선의 붕당은 패를 나눠 집결된 세력들이 학문과 논리로 무장한 관료들의 집합체였다. 붕당에겐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거주 지역과 연령 등의 특성이 반영된 별칭이 형성되었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 등 다양한 명칭으로 세력 간의 정체성을 구분 지을 수 있다. 이들은 학파와 지역은 물론 연령과 연고를 따지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오로지 백성과 나라를 위한 토론이라는 명분의 배경엔 절대 권력자 왕을 위한 충성경쟁이자 그들만의 리그전이었다. 토론식 정쟁에서 패배한 자는 사약을 받기도 하고, 승자는 오만과 독선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보니, 상대를 향해 죽기 살기로 투쟁했다. 붕당의 정쟁 즉 붕쟁(朋爭)은 목숨 건 투쟁이었고, 논리를 동원한 토론은 곧 자존심이 걸린 피 튀기는 설전이었다. 이들 세력의 승패와 상관없이, 지속적인 붕쟁 탓에 민초의 삶은 늘 곤고했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이들에 의해 옥좌에서 물러나는 치욕과 오욕의 쓴맛을 봤다.

한 때는 우리 정치권에 3김 세력이 있었다. 상도동(YS)-동교동(DJ)-청파동(JP) 계파로 이들을 구분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조선의 혹독한 각종 사화(士禍) 못지않게 상대진영의 인물들을 가차없이 손 봐줬다. 정권이 바뀌면 개혁과 변혁의 이름으로 적폐청산은 단골메뉴였다. 물러난 세력의 자손과 연고자까지 탈탈 털어 감옥으로 보내기도 한다. 이런 악순환 탓에 아직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옥고를 치르는 중이다.

조선조 붕당과 달리 작금의 정당들은 민주주의와 정의가 상대를 때려눕히는 논리제공의 근원이다. 정권이 바뀔 때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작동되는 합법적-보복적 폭력성은 아직도 건재하다. 마치 조선조의 사화가 재연되듯, 역사의 반복성이 참담하고 소름끼친다. 잔존하는 민주주의와 정의의 흠결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난제 중의 난제다.

국회는 의원 임기가 끝나 갈수록 바쁘고 어수선하다. 의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공천획득에 매달린다. 당 지도부는 총선 승리를 위해 당내 분위기를 잡아끌지만, 의원들은 선당후사(先黨後私) 보다 선사후당(先私後黨)의 심경이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이 나라 정치가 잘 굴러갈 것이라는, 일그러진 확신 탓에 근자감(根自感)에 빠져있다. 우리 정당들은 보수와 진보 및 중도라는 막연한 잣대로 유권자를 구분해 놓고 있다. 어차피 유권자는 정치가 형성시킨 그런 범주에서 한 표의 권리행사가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정당정치의 꽃으로 불리는 선거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다.

그래서 선거법이 중요하다. 현실은 어떤가. 선거법을 놓고 여야가 가열차게 대립했지만,  타협과 양보는 없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결국은 게임의 룰이 일방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우리처럼 선거법 손질이 잦고,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어도 속칭 위성정당을 창조해내는 나라는 유례가 없다. 여야 모두가 비례의석을 더 갖기 위한 꼼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선거법 자체가 모순투성인지라, 무슨 짓거리를 해도 막을 길이 없는 꼴이다. 선거법의 허점을 읽은 정당들이 정신줄을 놓고 명분도 소신도 스스로 다 내다 버린 것이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다 걸기(all or nothing) 게임이 되어버렸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탓에 나라가 온통 어수선하다. 선거보다 코로나19가 자주 화두에 오르는 현실이다. 민초의 삶에 보탬이 될 실용적인 정책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마저 흐릿하다. 선거 전에 허리를 크게 굽힐수록 그런 후보를 믿지 말라는 경험론적 충고가 있다. 지금처럼 진영 간의 극심한 대립과 제도권 정당들이 붕당형태로 사분오열된 정황이라면, 선거의 의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치에 대한 변별력이 취약하고 무관심한 유권자는 다시는 안 속는다면서도, 또 속을 것이다.

제도권 밖의 움직임은 더 어수선하다. 각종 직능단체와 이익단체들까지 나서서 정당으로 변신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거창한 이름으로 나서는 데 누가 말릴 것인가. 제도권에선 정치경험과 훈련은 물론 평소에도 정치에 대한 관심이 태부족인 젊은층을 대거 불러들이고 있다. 이들은 젊다는 이유만으로 최전선에 내세워져 정당 홍보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천과정에서 경륜과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도 가차 없이 칼질을 당하고 있다. 그 이면엔 같은 편 사람만 챙기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인물충원은 정당의 핵심사업이다. 정당 내에서 공천이 투명하고 정의롭지 않으면 특정 계파가 총선 이후에 다시 등장할 것이다.

작금의 계파는 오히려 조선조 붕당보다 명분도 철학도 취약하다. 오로지 권력과 사익을 추구하는 아부와 음모가 판을 치는 그들만의 유대관계를 위한 둥지일 뿐이다. 정치는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식견과 경륜이 없으면 지탱하기 힘든 직업이다. 선진국 정당들은 젊은층의 정치권 진입을 위한 다각적인 프로그램과 훈련을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당명도 함부로 안 바꾸고 정당의 역사도 오래될수록 지지층이 견고하다.

선진국에선 정당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거나 해체하지 않는다. 비례의석을 더 갖기 위한 위성정당들의 출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참 곤혹스럽다. 어제는 빨간색, 오늘은 핑크색. 이전엔 노란색이 지금은 푸른색으로 등등 정당들의 상징색과 당명도 천차만별이고, 너무 자주 바뀌어서 헷갈릴 정도다. 이렇듯 우린 여차하면 당명과 정강을 뜯어고치면서 당의 이미지 바꾸기에 여념이 없다. 탈을 벗었으면 맨 얼굴을 내보여야지, 탈을 벗고 또 다른 탈을 쓰는, 이런 식의 악순환은 언제 막을 내릴 것인가.

총선용 위성정당 탓에 20대 국회는 스스로 판 우물에 몸을 던진 격으로, 조선의 붕당을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타협과 상생의 정치가 아닌 대립과 분열의 정치는 종식되어야 마땅하다. 우리 정치의 후진성과 속 좁은 꼼수로 인해, 선진정치로 가는 길이 더 멀어지게 되었다. 위성정당 등장이란 기이하고 위대한(?) 사건은, 20대 국회의 수치와 오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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