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1993년 7월 31일, 참고인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검에 도착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언론사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며 질문을 하는 기자들 앞에 서면서 인권 찾는 김영삼이 눈에 어른거렸다. 해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나 그 믿음은 곧 무너졌다. 공안1부 903호실의 담당 검사 천성관을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내가 21사단의 사단장일 때 중위로 군법무관을 했던 부하였다. 사건을 조작, 언론 플레이를 통해 국민에게 알린 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든 사건 용의자들을 용서한다는 조건으로 설득해 같은 발언을 하도록 만들어 나를 피의자로 만든 사실이 너무도 부끄럽고 개탄스럽다.

그는 나를 늦게까지 조사했다. 그가 질문하는 일이란 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당당하게 “내가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천 검사는 내가 범인이란 전제하에 피의자들 진술을 토대로 물었다.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정의롭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온 나에게 정치검사에 지나지 않은 천성관이 내게 모욕을 주다니.

“야! 이 사람아, 내가 사단장으로 자네들을 이렇게 가르쳤나?”

나는 그에게 다그치듯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죄송합니다.”는 말밖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 진정 이래도 되는 것인가. 정녕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과연 내가 국민을 위해 목숨 걸고 지키려던 민주주의 국가인가.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단 잡아넣기로 짜 맞춘 정치검사의 시나리오 앞에 한 사람의 진실된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도 없었다. 맞았다는 진단서도 없었다. 더구나 테러를 당했다는 측에서는 당시에 고발조차도 하지 않은 사건을 7년이나 지나서 말도 안 되게 엮는 꼴이라니, YS 권력의 정치 보복이었다. 나는 천성관의 권력형 파렴치한 양심을 이해할 수 없다.

 

권력의 노예

1993년 7월 31일 오후 나는 참고인에서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 가족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통한과 분노가 복받쳐 올랐다. 이미 5공과 6공의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과 해병대 역대 사령관과 공군의 많은 비행단장 등이 구속되어 있었다. 나는 혀를 깨물고 죽어서라도 나의 결백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8월 6일, 나는 서울지검 공안1부 903호 조사실로 들어섰다. 같은 사건으로 두 번째 소환이었다. 천 검사는 구속 당일에 물었던 질문들을 다시 묻지도 않고 “고생 많으십니다.” 했다. “천 검사, 나를 쳐다보라. 왜 얼굴을 들지 않고 말하나.” 나는 벌떡 일어나 창밖을 보며 분노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천 검사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사건 당일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 내가 매년 4월에서 5월 전후로 정보교환을 위한 외국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때가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천 검사는 출입국관리소에 확인하여 사건 당일, 내가 출장 중이었음을 확인했다.

사건 당일 “내게 지시를 받고 양순직 의원에 대한 테러를 감행, 실패하자 공관으로 불려와 흰색 러닝셔츠와 파자마 같은 칠부바지를 입은 내게 심한 꾸중을 들었다”는 연극을 연출하여 피의자들을 재소환해 번복토록 하는 등 허위 진술서를 작성하도록 유도했다. 나는 큰 자식 그리고 딸과 며느리 앞에서도 파자마를 입지 않는다. 사실도 아닌 관계없는 복장을 거론하는 등 유치한 소설 같은 얘기였다. 다급해진 천성관은 최악의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천 검사는 나를 2차 소환 시 조사는 하지 않고, 사건을 시인하지 않으면 6개월간 구속한 상태에서 계속 조사하겠다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죄를 뒤집어씌우고 옭아맨 자체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죄 없는 사람을 옭아매는 권력의 노예가 된 천 검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출신이다. 더욱 기가 찬 것은 사건 내용과 관련된 질의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사건과 무관한 10·26, 12·12, 5·18 등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질문을 한 점이다.

내 앞에서 어느 지방지청장과 통화를 하면서 “형님, 제가 이번 인사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잘 되겠지요?”라며 차후 보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꼴이라니.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출세를 상의하는 철없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권력과 황금의 노예다.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천 검사는 16년 후 검찰총장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2009년 7월 13일,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린 다음 날, 검찰총장 후보자에서 사퇴한다. ‘스폰서 검사’라는 오명 등 많은 문제로 인사청문회 도입 사상 처음으로 검찰총장 후보자에서 낙마했다.

강남 지역 고가 아파트 구입자금의 출처와 금전 거래가 있는 기업가와 동반 골프여행 의혹, 부인의 명품 쇼핑 등 수없이 많은 개인 문제를 둘러싼 도덕성 논란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뿐이겠는가.

정보사령부에 같이 근무했던 이병조 장군이 한진구를 만나 “1986년 4월 29일 사건 당시, 사령관님은 외국 출장 중으로 한국에 계시지 않았는데 이를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랬나요, 저는 모르고 있었는데요.”라고 했다. 이병조 장군과 한진구의 대화를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결국 김영삼 정권에 아부하기 위한 권력 노예들의 장난이었음이 드러났다.

내가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은 게 있다면 진급을 빨리 하고 군을 통솔할 수 있는 참모총장직을 수행토록 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명예를 더럽히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은 누구인가.

5공과 6공을 군부 독재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문민의 정부라는 김영삼 정부는 더한 일들을 만들어 보복을 가했다. 국가를 위해 생명을 걸고 투쟁했던 사람들까지 잡아넣는 것으로 자신의 인기를 올린, 악질 대통령이었다.

건물을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부수는 데는 한순간이다. 제2, 제3의 나와 같은 피해자 방지를 위해서라도 나는 이 글을 써야 했다.

헌법 30조는 ‘타인의 범죄 행위로 생명, 신체에 피해를 받은 국민은 국가로부터 구조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치검사의 범죄로 생명보다 소중한 명예를 잃은 내가 국가로부터 구조 받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결자해지 차원에서 이 문제는 천성관이 석고대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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