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목숨건 침투 - 17 체육청소년부 장관(1991.12~1993.2) Ⅰ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목숨건 침투 - 17 체육청소년부 장관(1991.12~1993.2) Ⅰ
  • 뉴스티앤티
  • 승인 2020.02.10 13: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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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인간이 가장 행복한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 이진삼 -

체육청소년부 장관

“가족과 함께 테니스 라켓을 가지고 청와대 체육관으로 내일(1991년 12월 11일) 오후 3시까지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이현우 청와대 경호실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우리가 청와대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대통령과 영부인은 테니스 선수들과 몸을 풀고 있었다. 운동 후 저녁식사를 하면서는 군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노 대통령이었다.

“군 생활이 좋아. 강등해서 사단장 하라면 다시 하겠다. 군대가 제일 좋아.”

“군에서 여러 번 모시는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연대장 할 때 대대장으로 나를 도왔잖아. 부대 대항 운동시합, 시범, VIP 영접을 도맡아 하고 또 내가 9공수특전여단장 할 때 참모장 하면서 나를 도왔지. 그간 정말 수고 많았어. 내가 초대 체육부장관 했잖아. 중요한 자리야. 지난번에 이야기했지만 지난 24회 88올림픽은 우리 안방인 서울에서 한 거야. 1992년 제16회 알베르빌 동계올림픽과 25회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은 달라. 해보면 국민들도 관심 많고 보람 있을 테니 적성에 맞을 거야.”

1991년 12월 14일 오전 10시, 대통령 경호실장 이현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내일 10시까지 남성대 골프장으로 나오시랍니다. 겨울 날씨가 춥기 때문에 남자들끼리 치기로 했습니다.”

겨울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쌀쌀한 날씨였으나 골프 하기엔 지장 없었다. 윗분들을 모시고 골프를 칠 때는 점수가 높게 나지 않도록 살살 치곤한다. 이상한 것은 힘 빼고 살살 치면 더 잘 맞는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1 오버 파로 73을 쳤다. 17번 홀 수리지에서 옮겨 놓고 쳐야 하는데 그대로 쳐 파 할 것을 보기를 했다. 그래도 노 대통령은 “오늘 잘 쳤어. 72파 플레이 했으면 트로피 만들어 주려고 했지.” 그 말에 나는 “대통령 동반 트로피는 가문의 영광이지요.”로 화답하며 웃었다. 이틀 후 16일 오전 10시경, 이현우 경호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축하합니다.”

“뭔데?”

“조금 전에 체육청소년부 장관 결재 났습니다. 연락하라는 대통령 말씀입니다. 지금 뭐 하십니까?”

“골프 약속 있어 나갈 참이야. 12시 52분 티업이야.”

“오늘은 쉬시죠.”

이현우 경호실장과의 전화를 끊고 10여 분이 지났다. 각 신문사 체육 관계 기자들이 막냇동생 이진원을 앞세워 집으로 몰려와 취재에 열을 올렸다.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박철언 전 장관이었다.

“박철언입니다.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제가 잘해놓고 떠나야 하는데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께서 제게 자주 선배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며 겸손한 인사를 해왔다. 군대에서는 전후임 이‧취임식이 있는데 행정부에서는 떠나는 사람은 가방 들고 도열한 직원들과 악수하고 떠나는 것이 끝이다. 대통령조차도 취임식만 있고 이임식은 없다. 하루 전, 국무총리 주재하에 세종문화회관에서 200여 명을 초청한 가운데 식사를 한 후 이임 인사하고 떠나는 것이 대통령 이임식을 대신한다.

“앞으로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서 어떻게 할 계획인지 한 말씀 해주시죠, 장관님. 대형님으로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아직 출근도 하지 않았고 업무 파악도 하지 않았는데 뭘 얘기해? 차나 한 잔씩 하지.”

골프 약속이 있어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왔다. 그 다음 날,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부임하였다.

 

변함없는 가치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어떤 일이라도 어렵고 곤란한 일은 앞장 선다.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바꿔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웅희 총재 후임으로 국방부 장관이었던 이상훈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해봉 차관에게 지시하여 이웅희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이해봉 차관의 보고에 의하면 이웅희 의원은 “곧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 바뀌면 선거에 영향 있지 않겠느냐?”며 난색을 표했다고 하였다. 내가 해결할 생각으로 이웅희 의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거두절미하고 말을 꺼냈다.

“이 의원님, 이진삼입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내놓으시죠.”라는 내 말에 이 의원은 “곧 선거가 있잖습니까. 국회의원 선거 끝난 다음에 내놓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얘기 들었는데요, 이유는 묻지 마세요. 제가 1년 전 참모총장 재직 시 용인 지역 수해 복구 지원해드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겠다”는 답을 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공직 등 고위직에서 물러나면 끈 떨어진 줄 알고 풀 죽어 다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공직을 그만두고 더 바쁘다. 골프 치자고 했던 친구들과 골프 약속 잡기도 바쁘다. 나는 중령 때 전방으로 쫓겨 가 부연대장을 하면서도 연대본부 장병들과 일과 후 매일 운동을 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내가 끈 떨어진 줄 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내 생각은 다르다. 당당하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남들이 명품을 휘감았다고 해서 따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품위와 인격을 떨어뜨릴 뿐이다.

2004년 6월 10일, 아내가 고인이 되었다. 아내가 떠나고 두 딸에게 부탁해 장롱을 열어 유품을 정리하다가 24년 전 며느리가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온 시아버지 시어머니 명품 롤렉스 금시계를 발견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돌려줬다. 내 관심 밖의 물건이다. 모 중견기업의 회장은 문제가 생기니까 수염도 자르지 않고 두문불출, 몰골이 엉망이다. 사업이 실패하면 인생도 실패인 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업가는 부도나거나 검찰조사를 받으면 자살도 한다. 왜 그렇게 사는 것인지, 오히려 그럴수록 당당히 살아야 한다. 나는 부와 관계된 그룹 회장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2008년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1999년형 SM520을 타고 출퇴근했다. 한 번도 고장이 난 적 없고 멈춰선 적도 없다. 이를 본 국회 수위들이 “저기 옛날 유명한 참모총장 출신의 구닥다리 차 좀 봐. 차 앞자리에 비서도 태우지 않고 다니잖아”라고 말한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국회의원 임기 마지막 1년 동안 고속도로 전용차선 이용을 위하여 11인승 SUV를 1년간 리스해서 타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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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20-02-13 20:35:06
책임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