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회장님, 고맙지만

1991년 10월 오전 9시 태릉에서 골프 약속이 있었으나 오전 강수량이 20mm를 넘었고 오후에는 폭우 경보 발령까지 내려서 아침 7시경 취소하였다. 때마침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내흔 친구가 바람 쐬러 가자고 하여 어디론가 같이 갔는데 종로구 청운동의 현대그룹 왕회장 댁이었다. 정 회장은 백색 마스크를 벗으면서 “젊을 때 새벽 찬 공기를 마시며 일을 하다 보니 감기 면역성이 떨어져 조심하고 있다.”면서 독감이나 유행성 감기가 아니기 때문에 전염 걱정은 없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1개월 전 한강 수해 당시 행주대교 건너 일산 일대는 침수되어 바다 같았고 멀리 보이는 산은 섬 같았다. 현대에서 홍수 역류 방지를 위하여 대형 컨테이너 박스 30개로 제방을 쌓았고 군(軍)에서는 건설 공병단을 투입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덕담을 나누던 중 이내흔 사장이 화장실에 갔다. 그 사이에 정 회장은 백색 봉투를 꺼내 “내 정표니 받아요.” 했다. 반쯤 꺼내보니 아파트 문서였다. “사양하겠습니다. 오래전에 아버님이 조그만 아파트를 사주셨습니다.” 나는 거절하면서 꺼냈던 서랍을 열고 봉투를 제자리에 넣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커피 한 잔을 더 요청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친구가 의자에 앉으면서 “회장님, 몸도 불편하신데 쉬시지요. 우리끼리 나가서 식사하겠습니다.”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혹시나 친구가 백색 봉투에 대해 오해를 할까봐 은근히 신경이 쓰여 나는 슬쩍 떠봤다.

“정 회장께 말씀 잘 드려 주게. 정 회장 고마운 분이야.”

“무슨 말인데?”

재촉하는 친구에게 당시의 정황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전혀 몰랐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대전고등학교 동기인 그는 논산군 연산이 고향으로 성균대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하였고 능력 있고 인격이 훌륭한 친구다.

 

참모총장 그만 하겠습니다

사람에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그 자리가 들 자리인지 날 자리인지에 대해선 자신이 제일 잘 알게 돼 있다. 1991년 11월에 접어들면서 노 대통령의 임기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나로 인해 후배들의 인사가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노 대통령에게 인사 결재를 받으러 갔다.

“차 한 잔 하고 가지?”

“이제 참모총장 그만 하겠습니다.”

뜻밖이라는 듯이 노 대통령이 되물었다.

“이 총장, 국방장관은 해야 하지 않겠어?”

노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나는 전역을 결심한 내력을 풀어놓았다.

“지금 제가 군에 더 있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육사 16기 후배 대장 3명이 모두 제대를 해야 합니다.”

“그래? 그럼 더 있다가 총장 그만두면 되잖아. 6개월 후에 다시 보자, 이 총장”

“어차피 1년 있으면 대통령 임기도 끝나지 않습니까. 6개월 후에 참모총장 그만두고 장관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몇 개월 후에 나가야 합니다. 다음 정권에 제가 왜 있습니까?”

노 대통령은 내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92년도에 올림픽이 두 개나 있잖아. 2월에는 제16회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이 있고, 7월에는 제25회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이 있어. 그때 메달 따야 하지 않겠소? 88올림픽 때는 어쨌든 홈그라운드 이점이 있었음을 부정하진 못하잖아. 이 총장도 알다시피 내가 체육부장관도 하고 88올림픽 준비위원장도 하지 않았나. 이 총장, 그걸 맡아 해보면 보람을 느끼게 될 거야.”

“재미있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 제9공수특전여단장이셨고 제가 제3대 9공수특전여단장 하였는데 초대 체육부장 하신 곳에 제가 또……, 저 이제 후배들한테 물려주겠습니다.”

나의 손사래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 싫으면 또 한 가지 방안이 있다며 내 시선을 끌었다. 1992년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꺼내들었다. 3당 합당을 했으니까 김종필을 전국구로 보내고 지역구로 출마하는 것은 어떤지를 물었다. 이번에도 내 대답은 대통령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정치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 군복 벗자마자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 이런 말 안 하겠습니다.”

단호히 거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만 가겠다고 했다.

“허, 이 사람 고집 부리네. 앉으란 말이야. 원래 이 장군은 운동 좋아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잖아. 내가 초대 체육부장관 했어. 박철언은 체육부장관 희망해서 한 거야. 적어도 1년 이상은 할 거 아냐. 메달 충분히 딸 수 있잖아. 메달 따야 해. 1988년 15회까지 동계올림픽에서 메달 한 개도 따지 못했잖아. 24회 하계 서울올림픽은 솔직히 주최국으로 복싱, 유도, 레슬링 등에서 프리미엄이 있어 금 12, 은 10, 동 11개를 획득해서 160개 참가국 중 4위 한 거 아니겠어.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있을 16회 동계올림픽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있을 제25회 올림픽 잘해야 돼. 이 장군은 해낼 거야. 우리나라의 국위 상승은 물론 경제·외교·정치·교육·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돈으로 비교할 수 없는 간접효과가 대단하다. 내 말 들어”

대통령의 말을 뒤로 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전역을 결심한 그 순간부터 미국 UCLA에서 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1991년 12월 6일 육군참모총장 전역식을 마친 다음 날 바로 미국으로 떠날 비행기 표를 구매해 놓았다.

육사 11기 김복동 예비역 중장이 노 대통령에게 “지금 이진삼이 미국으로 간다고 하는데 확인해보십시오”라는 귀띔을 했다. 정해창 대통령 비서실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총장님, 미국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일 하셔야 하잖습니까. 한국에 계시지요” 하며 만류하였다.

“감사합니다만 가고 안 가고는 내 자유입니다.”

30분 후 서동권 안기부장으로부터도 “외국 가지 말고 같이 일합시다.”

나는 똑같은 답변을 하였다. 대통령께서 두 사람에게 지시하신 것으로 판단하였다.

 

참모총장을 마치며 병사들에게 보낸 마지막 지휘서신.

 

수신 : 육군장병                                                             1991. 12. 6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가운데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가운데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 사 43:1-2 -

                1991. 12. 6 아침

육군참모총장

            대장   이    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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