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길 위로 길이 지나가고 길 아래로도 길이 지나간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게 그리 오래지 않다. 사람은 웬만큼 나이를 먹으면 예지가 번득이는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길이 느껴졌다. - 정우영(1960- ) 시「우리 밝고 가는 모든 길들은」1

고샅길, 꽃길, 황톳길, 산길, 잿길, 벼룻길, 한길, 빗길, 밤길... 하늘 이고, 땅 딛고 사는 동물들의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거기에 물과 불의 길이 더해져 길섶은 해와 달 좇으며 사철의 풍경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 경치에 눈과 손, 발의 길을 보내며 꿈길을 연다. 그렇다. 길, 길 해도 짜장 인생길은 낯설다. 아무리 마음이 품고, 막아도 뜻대로 걸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곡절로 ’털 없는 원숭이‘들은 때때로 외길에 대한 회한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세월이 보장하는 바 없지만 춘추가 쌓일수록 예지가 빛난다 믿으면서 말이다.    

눈 덮인 숲에 있었다 /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 앉는다 / 대체로 눈이 쌓인 겨울 속에서는 /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 박남준(1957- ) 시「적막」부분 

2020년 올해 62세가 되었다, 나는.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 시대적 조류를 벗어나 자발적 유폐한 지 6년- 초등학교 3학년에 떠난 고향을 46년 만에 돌아왔었다. 그동안 두 번째 산문집『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를 펴냈고, 농막에서 본채 지어 어중간於中間 표석 세우고 입택했다. 당호는 충북 영동이 경부철도 441.7km의 절반이라는 지리적 의미, 천/지/인 삼재 그 중간자의 소여로 산다는 뜻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휴먼북human-book 도서관을 여는 일. 오래전부터 글말뿐만 아니라 입말의 인간 자체도 책이라는 주창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문회우以文會友- 해가 비틀거리는, 인생길 쉰 살의 전후 ’오후‘ 넘어서는 사람책들이 교류하는 일속산방이 되리라. 물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빙탄氷炭의 냉정과 열정, 그 길에서의 일탈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력과 재력, 체력의 ’3력‘을 움켜쥐었다가 저마다 신화적 상징의 ’해거름과 겨울‘에 이르면 내려놓는 게 한뉘 아니던가? 그렇게 다산선생 표현대로 나의 문심혜두文心慧竇가 열렸다 여긴다. 지난 정초 이런저런 잡념 뿌리칠 요량에 어중간을 나서, 유년의 소풍길 따라 입산했다.
               
도마령은 여전히 가없이 아름다운 길이었다.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 경북 김천의 세 방향으로 여인의 치마를 봉긋이 올린 듯 선 삼도봉의 민주지산- 충청도 상촌으로 내려온 재가 바로 도마령인데 말 그대로 구절양장이다. 도연명과 이백의 ’도화원桃花源‘ 풍광이 이럴 것인가? 주자가 복거卜居- 거처를 정한 오부리 병산屛山 기슭의 마을이 꼭 이럴 성싶다. 흩날리는 눈발은 소나무와 전나무를 자꾸 노인으로 만들자 애쓰는데 물한계곡은 이미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 되었다. 

엄동설한- 북풍의 냉기에도 얼음장 밑 물고기는 유영하고, 나목들은 동지冬至가 피운 따뜻한 기운으로 물을 잣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남쪽 바다부터 봄이 오르면 복숭아꽃 환한- 석숭의 금곡원金谷園처럼 사람들 북적거리리라. 절기는 어김없이 순환해 주객들 떠나는 길에 장맛비 퍼부을 터. 낙엽 쌓이는 그 주석에 이슬과 서리 맺히고, 또 눈이 내릴 것이다. 열자 식으로 이승의 막히고, 끝나는 길은 멈추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죽음‘뿐이다. 하룻길 50여 리 여정은 끝났지만 희번히 새날이 밝았다.  

기억법에 대한 연구에서 주로 조명하는 곳은 기억 궁전이라는 공간 장치이지만, 저장된 정보를 기억해내는 방법은 박물관을 찾은 사람처럼 둘러보며 걷는 행위이다. 같은 길을 다시 걸어가는 것은 같은 생각을 다시 하는 것과 같다. 걷기는 곧 읽기다. 정원과 미로, 십자가의 길이 흔들리지 않는 텍스트였듯이, 이제 기억의 풍경이라는 텍스트도 그에 못지않은 안정성을 얻게 된다. 이제 책이 기억 궁전 대신 정보 저장소가 되었지만 아직 책에는 기억 궁전의 몇 가지 패턴이 간직돼 있다. 길이 책을 닮을 수 있듯, 책도 길을 닮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길을 닮은 책은 걷기라는 읽기를 통해 세계를 그려나간다. - 리벳카 솔닛『걷기의 인문학』1부 생각이 걷는 속도 중 ’상징으로 걸어 들어가다‘  

걷기는 곧 읽기다- 새해에도 읽거나 걷고, 쓰는 자발적 행위는 계속된다. 회두리에 세 번째 산문집, 마지막 책이 완간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가제가『장자의 친구, 혜자 이야기』나『혜자와 장자가 묻고, 답하다』인데 그저 그냥 쓰고자 한다. 장주는 제자들과 장례식에 가다가 친구의 묘 앞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혜자가 죽은 뒤로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장자』제24 서무귀) 사람은 사람과 자연에게서만 배우는 법. 천문에 통달한 현자가 서로 인문의 결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한 실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진귀하게 여기는 도는 책에 씌여져 있다. 그러나 책은 말을 적어놓은 데 불과하다. 세상 사람들은 말을 진귀하게 여기고 책에 적어 전했다. 세상 사람들이 그 책을 중시한다 해도 나 장자는 귀한 게 못 된다고 생각한다. 환공이 성인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바퀴를 만드는 사람이 “어르신이 읽는 책은 옛 사람의 찌꺼기와 같은 보잘것없는 것입니다.”(『장자』제13 천도) 편언절옥- 맹목적으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 변혁을 시도하는 진정한 궁리가 먼저다! 

장주는 혜시를『장자』의 마지막 장「천하」에 이렇게 소개했다. “그의 학설은 다방면에 걸쳐 있고, 저서는 다섯 대의 수레에 쌓을 정도”이지만, “도는 이것저것 뒤섞여서 정리되지 않고, 내용은 사물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어서 혜자의 핵심명제 10가지-「역물십사」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의 저술은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지만 십사는 환단과 공손룡을 비롯한 명가名家들의 학설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훗날 유가의 맹자와 순자가 혜자를 비롯한 궤변학파를 맹비난했지만 묵가墨家는 비교적 옹호적인 입장이었다. 최초로 문자, 그 의미 자체를 천착한 그들의 대거리를 도외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자의 발명이 인류에게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비판적, 추론적 사고와 성찰 능력을 위한 민주적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집단적 양심의 기초입니다. 21세기에 우리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집단적 양심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깊이 읽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하고 모든 시민을 재교육해서 개개인이 매체를 불문하고 비판적이고 현명하게 정보를 처리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성적 사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20세기 사회만큼이나 실패한 사회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 매리언 울프『다시 책으로』9번째 편지「독자들이여 집으로 오세요」

나는 ’책‘을 ’사람과 자연, 시간 이야기‘로 새겨왔다. 수불석권- 아직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불가역성의 시간 속 인문과 천문의 이야기가 책에 아로새겨진다. 나 역시 그런 축이지만 속 시원하고 후련하게 들려주는 활자나 사람 책- 이야기꾼을 만나지 못한 탓에 책장을 넘기고, 여전히 걷는다. 아무쪼록 알베르토 망구엘(1948- )의 정언을 되뇌면서, 새해 딛는 곳곳의 길마다 행운이 넘쳐나시길 비손합니다.

세상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인 것처럼, 책은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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