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시골집 동네 분들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법 굵은 빗줄기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식사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폭우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비가 좀 와야지. 너무 가물었잖아." "이렇게 비가 좀 내리면 연못에 물이 찰 것 같습니다." "올 봄 마당에 심은 벚나무는 심한 가뭄에 한쪽 가지는 죽은 것 같아요. 같이 심은 백일홍은 올해는 꽃 피기 어렵겠어요." 일행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폭우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여 폭우는 계속되었고 맛있는 식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 참! 차고 밖에 세워둔 자동차 앞 창문을 활짝 내려놓았잖아. 아침부터 열어 놓았으니 하루 종일 비가 들어갔을 텐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걱정이 태산 같아졌습니다. 가슴이 불안하고 편하게 먹고 있던 저녁 자리가 좌불안석이 되었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던 일행들도 전후 사정을 듣고 같이 걱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차를 타고 오는 바람에 혼자 먼저 일어날 수도 없고 곧 식사가 끝날 상황이라 한 10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불과 5분 전만 해도 <폭우 속에 차 창문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잖아. 그때는 마음이 편안하였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는 그 걱정이 머리를 온통 점령하고 말았네. 사실 바뀐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차는 몇 시간 동안 비를 맞고 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맛있게 저녁 식사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생각 하나로 이렇게 상황이 급변해 버렸네. 그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집에 도착해서 아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미리 안다고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 사실을 알았으니 식사를 좀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몇 분이 뭐 그리 중요할까. 결국 이 걱정은 해결책이 없는 문제에 대한 걱정에 불과하네."

마음을 이리 정리하고 나니 좀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것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마저 억누르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한 대목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떤 외적인 일로 네가 고통을 받는다면(걱정을 한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그 외적인 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너의 판단이다. 또한 그 판단을 당장 지워 없애는 것은, 너 자신에게 달렸다."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쉽게 그 판단이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정도 되는 인격자라면 생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쉽게 생각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일행들의 식사가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걱정이 점점 구체화되었습니다.

"창문 올리고 내리는 장치에 물이 들어갔을 텐데,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바닥에 물이 빠지는 데가 없으니 물이 흥건히 고여 있을 거야, 그러면 혹시 브레이크나 엑셀에 물이 들어가 작동하지 않으면 고장 신고를 하여야 하지 않을까. 가죽 시트에 물이 흥건히 찾을 테니, 그 가죽시트는 어떻게 말려야 하는 거지. 혹시 버리는 것 아닐까. 꽤 비쌀 텐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불과 10분 거리가 1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혹시 창문이 다 닫혀 있지 않을까요." 제가 하도 걱정을 하니 동네 주민 한 분이 위로를 하느라 말을 툭 던졌습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을까 하는 바람을 하였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창문을 닫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드디어 집에 도착하였고 차에 다가가니 예상대로 앞 창문 두 개가 모두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일행들은 돌아가고 저는 수습을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만큼 물이 흥건히 고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가죽시트가 물을 다 먹은 모양입니다. 바닥도 바닥 시트가 물을 먹었는지 고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리는 폭우 속에 집에 있는 수건이란 수건은 다 가져다가 차 안에 있는 물기를 빨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비가 들이쳤는지 손잡이 부근에 있는 홈통에 물이 반쯤 고여 있었습니다. 바닥 시트에서는 수건으로 훔치고 훔쳐도 여전히 물이 배어 나왔습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나야 마를 텐데 폭우 속에는 하는 수 없었습니다. 수건을 여기저기 펼치고 물기를 빨아내는 임시변통을 한 후에야 이 사태가 수습되었습니다.

대충 정리를 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차에 앉아 시동을 켜보았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창문 스위치도 오르락내리락하니 잘 작동되었습니다. 다만 안전벨트를 매어도 안전벨트를 메라는 신호음이 계속 났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 번 하니 멈추었습니다. 아마도 어느 부분에 물을 들어갔다가 마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다만 손잡이 홈통에 넣어둔 차고 리모컨은 물에 잠겨있는 바람에 배터리에 물이 들어가서인지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트의 물기를 해결하여야 할 숙제만 남았습니다. 최소한 6시간은 폭우 속에 창문을 열어놓은 실수치고는 가벼운 제재를 받은 셈입니다. 눅눅한 운전석 시트에 앉아 식당에서 창문을 열어놓은 사실을 안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1시간을 회상하여 보았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차에 도착할 때까지 20여 분 동안은 제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착하여 40분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였습니다. 간단히 도식화하면 걱정 20분, 행동 40분으로 나누일 것입니다.

행동 40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수건으로 물을 닦고 또 닦았습니다. 그저 행동하였을 뿐입니다. 사전의 계획이나 설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눈으로 상황을 보고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생각을 한 시간은 걱정한 시간 20분 동안입니다. 그 20분은 2시간에 버금갈 정도로 지루하였고 오만가지 상상을 다 하였습니다. 그것도 가장 나쁜 상황을 상정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판단을 지워 없애라고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차에서 나와 집에 들어가 젖은 몸을 샤워하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컴퓨터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제가 작년 5월에 쓴 글 하나를 만났습니다.

"걱정이란 놈의 실체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걱정은 일정한 속도로 내 앞에서 달리고 있다. 내가 그 걱정을 바라보고 기진맥진하여 주저앉으면 걱정은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비웃는다. '네가 그것밖에 안 되지 내가 좀 너를 건드니까 그만 털썩하고 주저앉아 버리잖아.' 걱정을 극복하기 위해 일어나 걷기 시작하면 걱정은 같은 속도로 걸으며 내 귓가에 속삭인다. '너 힘들지 고민되지 답답하지 그러면 주저앉아 나하고 같이 지내자.' 그러면 나는 걱정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자. 힘차게 떨치고 일어나 달려보자. 걱정도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걱정이 달리는 속도보다 내가 달리는 속도가 더 빠르면 걱정은 허덕대기 시작한다. 걱정은 점점 멀어진다. 드디어 걱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길을 바꾸어야 한다. 뒤따라오는 걱정이 나를 찾지 못하게. 걱정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걱정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이 아니다. 실제이다. 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라. 그리고 밖으로 나와 뛰기 시작하라. 5분만 달리면 걱정은 사라질 것이다."

어제 상황에서도 걱정과 대화를 나눈 20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오히려 걱정의 포로가 되었을 뿐입니다. 대신 걱정을 마주하고 행동에 돌입하자 걱정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저보다 뒤처졌거나 저를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걱정거리가 있으십니까? 달리십시오. 걱정은 여러분의 생각만큼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