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 조직

산남창의지(밀지 내용) 모습 / 독립기념관 제공
산남창의지(밀지 내용) 모습 /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을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1일부터 31일까지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1862년 충절가문으로 알려진 영일정씨 집안에서 태어난 정용기 선생은 어려서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지만, 1887년 아버지 정환직이 벼슬에 오르자 함께 상경하여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고종은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밀지를 내렸으며,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용기 선생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1906년 영천으로 간 정용기 선생은 영천창의소를 설치하여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고, 권세가를 비롯한 각종 통문이나 격려문을 지어 의병으로 나설 것을 호소했으며, 같은 해 2월 의병 1,000여 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되었고,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을 이름으로 정하여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하였다.

같은 해 4월 아버지가 경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기 선생은 급히 경주로 향했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관군의 계략이었고, 결국 정용기 선생은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어 대구경무소에 구금되었으며, 대장을 잃은 산남의진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 4개월이 지나서야 풀려난 정용기 선생은 ‘일제가 만든 외채를 국민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봄 정용기 선생은 산남의진을 다시 조직하였고, 소규모 지역 의병부터 군인 출신까지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하였고,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산남의진은 포항 청하와 영천 자양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9월 포항 죽장으로 이동하여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을 당해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정부는 정용기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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