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지금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나의 시선과 그 대상이라는 이 두 낭떠러지 사이에다가, 그것들을 파괴시킨 세월이 그 잔해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산마루는 작아지고 벽은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장소는 늙어버린 지각의 떨림으로 흩어져 버린 앙금처럼, 서로 부딪치다가 나란히 놓이기도 하다가 또는 서로 뒤바뀌기도 한다. 맨 밑바닥에 있던 오래된 작은 일이, 뾰족한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르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내 과거에 누적된 모든 것이, 자취도 남기지 않고 가라앉아버리는 일도 있다. - 레비스트로스『슬픈 열대』(1955년) 제1부 선행지

시선과 대상이라는 두 낭떠러지- 1780년 연암 박지원이 홍명복洪命福에게 물었던 바로 그것입니다. “자네는 길을 알고 있는가?” 무슨 뜻이신지... “길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지.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네.” 저 언덕에 먼저 오른다는 말을 지적하시는 건가요? “이 강은 저들과 우리와의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라면 물이라야 한다. 온 세상 사람들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 마치 물 아니면 언덕에 있는 것과 같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물과 언덕 가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일세.” 외람되게 자꾸 여쭙니다만 그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연종을 맞았습니다. 1959년생으로 올해가 저의 회갑년이라 그 어느 해보다 각별했는데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쇼펜하우어가 참 진묘한 아포리즘을 던졌습니다. 하루는 작은 일생- 이에 기대면 1년은 좀 더 큰 일생일 터. 몸과 마음 부리며 살아낸 한 해 동안 참 많은 일들이 벌어져 수습되었거나, 미완의 과제로 남겨졌습니다. 차안과 피안 그 사이를 ‘낭떠러지, 강’이라고 지칭한 현자들도 있지만 저는 ‘그승’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있으니 지금, 여기의 사람은 저마다의 그 승을 사는 것이 아닐까 여기는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일찍이 기하학이 있어 한 획의 선을 변증하는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그 자세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빛이 있고 없는 식으로 표현하였고, 그러기에 불씨佛氏는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였으므로 그즈음에 선처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길을 아는 사람이라야 능히 할 수 있을 터인즉 옛날 정의 자산 子産 같은 사람이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지. - 박지원『열하일기』도강록 서: 6월 24일

공자께서 자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군자의 도 네 가지를 갖추고 있었다. 처신에는 공손하고, 윗사람 섬김에는 공경스러우며, 백성을 먹여 살림에는 은혜롭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의리에 맞게 하였다.” -『논어』제5 공야장

사람으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게 어렵다 했지요. 연암의 석가모니는 그렇다 해도 천하의 공자가 닮고 싶었던 같은 시대 정鄭나라의 정치가 자산의 처신이 최고의 경지가 아닐까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람이 네 가지 덕을 모두 갖출 수 없겠지만 그중에 ‘인’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힙니다. 공구의 인仁은 글자 그대로 ‘두 사람二人’,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서로를 배려, 존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아마도 그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예가 통과의례通過儀禮,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사람과 자연에서만 배운다 했지요. 사람의 인은 자연의 순환 그것과 동등한 의미일 것입니다. 어른이 되고 혼례를 치르는 일은 부모가, 상례와 제사는 후손의 몫임이 분명합니다. 밤과 낮 그 해와 달이 교차하고, 사철이 맞물려 이어지듯 말입니다. 저는 아들과 딸 남매를 두었는데 지난 12월 29일에 딸애 혼사를 치뤘습니다. 이제 그승에서 저의 ‘임무’를 끝내자 아득하고 허전한 상념이 들더군요. 특히 양가의 혼주가 주례를 갈음한다는 결정에 축사를 쓰면서 더욱 그랬습니다. 허접하고 난삽한 글이지만 공유합니다. 2020년 경자년 새해- 더욱 건승, 건필하시길 비손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렇게 아름답고, 뜻깊은 결혼식에 함께 자리해주신 하객 여러분- 반갑고, 고맙습니다. 날씨도 춥고, 연말이라 바쁘실텐데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아울러 드립니다.

흔히들 결혼을 인륜지대사라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 형제들은 하늘이 맺어주는 천륜이고, 결혼은 사람들끼리 땅에서 인연을 맺는 가장 큰 일입니다. 먼저, 이번 혼사를 허락해주신 신랑 박성일군의 부모님을 비롯한 일가, 친척분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다음으로 저의 아버님을 소개해 드립니다. 올해 아흔한 살이신데 손녀의 백년가약을 지켜보기 위해 왕림해 주셨습니다. 경주 김씨 상촌공파 29세손으로 손자 연웅의 아들, 이안 증손자도 보셨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외증손도 보시면서 백수, 천수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아버님 형제 7형제의 막내 숙부께서도 오셨고, 일찍 돌아가셨습니다만 넷째 작은 아버지 숙모님께서도 자리하셨습니다.

사실 지난 10월 양가 상견례 이후에, 유명한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이시죠- 피천득교수의 ‘시집 가는 친구의 딸에게’ 라는 글을 읽으며 상상해왔습니다. 누구보다 오늘의 제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잠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식장에 너를 데리고 들어가는 너의 아버지는 기쁘면서도 한편 가슴이 빈 것 같으시리라. 눈에는 눈물이 어리고 다리가 휘청거리시리라. 시집 보내는 것을 딸을 여의다 라고도 한다. 왜 여읜다고 하는지 너의 아빠는 체험으로 알게 되시리라.

그런데 막상 사랑하는 딸을 성일군에게 맡기면서, 그냥 딸애를 잃는 게 아니라 아들 하나를 더 얻는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신랑과 저의 장남 연웅이가 대전의 명문사립 명석고등학교의 동창생이기 때문입니다. 설마 동창생에서 가운데 ‘창’ 자만 빼면 다 같은 동생이 되는데, 의좋은 남매처럼 서로 살갑게 잘 보살피며 살아가지 않겠느냐! 그런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참 감사한 인연입니다.

그런 믿음이 충만하지만 딱 한 가지만 신혼부부에게 당부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과 밥, 꿈 속에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부부는 그 밥이 되는 일과, 미래의 꿈을 위해 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고, 합심해서 앞날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밥 먹자- 잠 자자- 하는 소리는 대화가 아닙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연구,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탐구, 나아가 서로 인격의 도야를 위한 대화가 계속될 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혼례에 자리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 올리면서 이만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이제, 2019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마무리 잘들 하시고, 경자년- 희망찬 2020년 새해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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