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진위(眞僞) 구별법

1989년 4월 6일, 참모차장의 자리에 보직된 지 9개월 만에 노태우 대통령은 나를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러면서 서부전선인 용인의 3군사령부로 발령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서울 인근에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주에 있는 1군사령부는 산악3군단과 21사단이 휘하에 있다.

“정호근 장군은 임기가 다 됐으니까 1군으로 제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3군사령부는 간 지 4개월밖에 안 됐으니까 보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만약 내가 노 대통령의 뜻대로 3군사령관으로 부임해 갔다면, 앞선 사령관은 임기 전에 옷을 벗어야 했다.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옷을 벗지 않게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3군사령관 출신이 참모총장을 많이 했다. 반면, 1군사령관 출신은 19대 서종철 대장 이후로 7년 만에 정승화 대장이 22대 참모총장이 되었고, 11년 만에 1군사령관이었던 내가 28대 참모총장이 된 것이다.

내가 3군사령부로 안 가겠다고 하자 노 대통령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내 말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으로선 1군사령부만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전방을 맡은 사령관 둘을 동시에 바꾸는 것보다 한 곳만 바꾸는 것이 대통령 입장에서도 덜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참모총장

1989년 3월 29일, 백선엽 장군으로부터 진급 축하 전화가 왔다.

“나는 1952년 7대, 1954년 10대 참모총장을 하였고, 1953년 12월 창군 이래 최초로 대장이 되어 초대 1군사령관을 하였소. 대장은 군 통수권자가 알아주고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라고 하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내가 초대 군사령관으로 이‧취임식에 참석하겠소. 앞으로 군이 잘될 거요. 우리 충성을 다합시다.”

노병의 말에 감명 받았다. 나는 21사단장과 3군단장을 역임했기에 1군사령부에 가서 연계된 업무(땅굴)를 결말내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다음 날 저녁, 나는 가족과 함께 청와대 식사초대를 받았다. 김옥숙 여사가 대장 진급 축하 선물로 가벼운 솜이불을 선물로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1군사령관으로 꼭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내비쳤다. 노 대통령은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땅굴을 발견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발견하지 못하면 허언이 될 것 같아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기로 했다. 술 한 잔 마신 김에 나중에는 어떨망정 의지를 내비쳤다.

“제가 21사단장과 3군단장 때 발견 못한 땅굴을 발견해내겠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하여 1군사령관을 원했습니다.”

“이 장군은 한 번 한다면 해내야 직성이 풀리지. 한번 해봐.”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선엽 장군 말씀이 제가 군사령관 한 다음 참모총장 해야 하는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에 놀란 표정의 노 대통령이 톤을 높여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옆의 김옥숙 여사가 “하셔야죠.”라며 거들었다.

“저는 TK(대구‧경북)가 아니라서 참모총장 못 된다고 하던데요. 육사 선배 11기 정호용, 12기 박희도, 현재 14기 이종구 대장 모두 TK 출신으로 참모총장 아닙니까. 대통령께서도 TK(대구·경북) 아니십니까?”

“허 이 사람,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못 해?”

노 대통령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럼 시켜주실 겁니까?”

내 말에 노 대통령은 주저함 없이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국가를 위해 전투력 증강 차원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로선 과거에는 감히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육군대장으로서 국가보위에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겁 없이 대통령에게 다짐을 받은 셈이 되어 죄송스럽기도 했다.

 

속도보다 방향

1990년 1월, 베트남사령관과 2군사령관이었던 예비역 채명신 중장이 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나는 1군의 전투준비 상황에 대해 브리핑 했다. 채 장군은 평소 전략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장군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제1군의 전투 및 전략 계획과 추진 상황을 브리핑 받고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방문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만족스럽긴 처음이다. 야간과 산악전투에서 밀린 6·25의 경우를 세밀히 분석해 새롭게 수립해 놓은 작전 계획과 그 준비 상황은 대단했다. 과거 도상으로만 수립해 놓은 몇 단계 방어진지 구축 계획이 기막히게 준비돼 완성 상태라는 보고를 받고 놀랐다. 특히 야전 포병의 대포병전을 포함. 포병 전투 준비 사항을 보고 받고 더욱 놀랐다. 이와 같은 1군의 전투력 증강은 전군에 적용돼야 한다.”

채명신 장군은 전국을 다니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군에 대하여 “정치군인이 아닌 순수 야전지휘관의 기용은 군과 나라를 위해 아주 잘한 인사라고 생각한다. 군인은 야전성 있는 자를 발탁해야 한다. 우리 군도 이제 성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등 교회에서 간증을 하곤 했다. 채명신 장군의 이 같은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가졌던 가치관이나 철학은 처음부터 지금껏 스스로를 위한 속도를 내는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제나 국가를 향한 한 방향이었음은 틀림없다. 내 일신을 위한 삶에 속도를 내고자 했다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보직을 택했을 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속도도 필요하지만 방향 선택이 더 중요하다. 언제나 내 삶은 속도가 아닌 방향에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성질이 급한 것을 반성하면서 가급적 많은 지휘관 참모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어떤 때는 알면서도 참모들의 파악 여부를 확인 차원에서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하였다.

명시된 임무를 부여하고 추정된 과업도 수행하는지 확인하면서 참모들을 훈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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