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연말이다. 가면 오고, 매양 오면 가는 게 시간 아니던가? 하지만 매년 이 무렵이면 슬그머니 조급증에 빠진다. 기실 몸과 마음 부리며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회한 때문이리라. 아무리 품거나 막아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사인데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좋을 터. 충북 영동으로 귀향한 지 5년- 짬짬이 마을의 고샅과 들길을 산책하고, 경부철길 건너 선산에 오른다. 그럴 때면 손가락 사이의 물처럼 말과 글들이 사라지지만 물기로 남은 명문들의 윤슬이 반짝인다. 길섶의 서리와 눈에 바짓단이 젖듯이 말이다.

‘말씀’은 이미 대부분 다 말해졌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 누가 우리를 불러 말이 아닌 ‘행동’으로, 계절과 한 해의 위대한 행동과 영혼의 주기週期의 행동으로, 남자의 삶과 하나 된 여자의 삶의 행동으로, 순환하는 달의 작은 행동과 순환하는 태양의 보다 큰 행동으로, 그리고 저 거대한 항성들의 가장 큰 행동으로 향하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생명의 행동이다. - D.H. 로렌스 자전적 에세이『귀향』중

노팅엄의 이스트우드에서 가난한 탄부의 아들로 태어난 로렌스(1885-1930)- 시와 소설, 희곡 작가로 영국 문학을 대표하지만 그는 외설 시비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인물이었다. 당시『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비롯한 소설 몇 편이 발매 금지를 당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영국이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자본화 속에 불거진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도덕적 잣대, 자연 훼손, 제1차 세계대전의 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한몫을 했다. 산업혁명과 전쟁에 파괴되는 인간적 공동체와 자연과의 유대감에 대한 선구적 비판이 정부 당국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사회도 동일한 궤도를 밟아왔다.

사냥꾼이 도요새를 수렵하고 중금속에 오염된 폐수와 그 폐수 속에 살고 있는 먹이가 도요새의 새로운 적으로 부상되었다. 자유로운 삶의 터를 찾아 길고 긴 도정 중에 나는 그렇게 낙오되는 도요새가 아닐까. 대열에서 낙오되는 그 수효가 몇백 마리, 아니 몇천 마리 중의 하나일지라도 내가 바로 그 하나가 되어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설령 이렇게 숨 쉬며 살고 있어도 혼이 빠져버린 가사상태일는지도 몰라.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책이 꼬리를 물고 그의 얼을 뽑았다. - 김원일 소설「도요새에 관한 명상」

1979년에 발표된 김원일(1942- )의 이 중편소설은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학생운동으로 명문대학에서 제적된 주인공 ‘김병국’ 가족 4명의 눈을 통해 산업화 따른 공해와 민족의 분단 문제, 세대간의 갈등을 폭넓게 조명한 걸작- 이재선은「초월의 표상으로서의 새」라는 평론에서 “우리는 단순히 개인들의 고통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이념분단의 냉엄한 역사에 찢긴 우리 모두의 고통과 향수를 확인하게 된다.”고 주석했다.

“그래 어쨌거나 우리가 녀석을 떠나온 건 백번 잘한 일이었을 게다. 게다가 이제부터 도시엔 겨울 추위가 몰아닥치게 되거든. 너 같은 건 절대로 그 도시의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그 작자도 아마 그걸 알았을 게다. 글쎄, 네 놈도 그 작자가 암말 못 하고 멍하게 날 바라보고만 있는 꼴을 봐뒀겠지.” ...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우리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나서길 얼마나 잘했는가를 말이다. 남쪽은 훨씬 북쪽하곤 다르다. 겨울에도 대숲이 푸른 곳이니까. 넌 아마 대숲이 있는 곳이면 겨울도 그만일테지. 내 너를 그런 대숲으로 데려다 줄 테다.” - 이청준 소설「잔인한 도시」

도시의 북쪽에 자리한 교도소에서 출소한 ‘늙은 사내’는 도심의 공원에 머문다. 그러면서 ‘젊은 새장수’가 파는 ‘새’를 사서 방생하는데 어느 날 밤에 그 새들을 다시 잡는 녀석을 목격하고 의심하게 된다. 마침내 날갯죽지의 깃털을 잘라 멀리 날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방면했던 그 ‘새’를 사서 남쪽의 고향으로 떠난다. 1978년 「한국문학」2월호에 발표된 이 중편소설은 1970년대 말 우리 사회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구속과 자유의 세 공간인 감옥과 공원, 그리고 고향- 새 역시 그 공간의 일원으로 날아다니다 사내와 함께 대숲의 남쪽으로 이주한다.

1970년대 말과 지금, 여기의 2019년 그 40여 년 사이에 짜장 역사는 진보하고 발전했는가? ‘사내와 새’는 남쪽 그 대숲으로 아직도 가고만 있는가? ‘장진포 등대’는 여전히 불을 밝히는데 왜 그 많던 도요새는 돌아오지 않는가? 로렌스가 제언한 ‘생명의 행동’은 요원한 구두선에 그치고 마는 것인지...

갇힌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 못의 물고기는 옛 연못을 그리워한다네 / 남쪽 들 가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 졸박함을 지키고자 전원으로 돌아왔다 ... 집 뜰에는 번잡함이 없고 / 빈방에는 넉넉한 한가로움이 있다 / 오랫동안 새장 속에 있다가 /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다네 – 도연명의 한시「귀원전거歸園田居: 고향에 돌아와 살다」부분

29살에 벼슬길에 올랐지만 41세 되던 해 누이의 죽음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류선생(365-427)- 세상이라는 새장의 속박에서 벗어나, 문 앞의 다섯 그루 버드나무에 옮겨 다니며 음풍농월한 시인 중의 시인- 그는「형영신形影神: 몸과 그림자, 정신」이라는 제목의 3수를 통해 인생의 비책을 제시했다. “사람이 천지인 삼재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 어찌 나 정신 때문 아니겠는가 / 몸과 그림자 그대들과 다르지만 / 서로 의지하고 붙어 지냈지 ... 끝날 때가 되어서는 바로 끝나야 할 것이니 / 다시는 홀로 많은 근심을 하지 않으리” 몸은 술을, 그림자는 출세를 추구하지만 회두리에 정신의 입장에서 대균大鈞, 곧 자연과 합일되는 경지에 들라는 권면이다.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두 마리 새가 함께 어울려 나타나 같은 나무에 깃드네. 두 마리 가운데 하나는 열매를 맛있게 먹고, 다른 하나는 먹지 않으며 바라만 보네. 몰두하는 인아人我는 같은 나무에서 하릴없이 미혹되어 슬퍼하네. 이와는 다른 흠모하는 주인과 그의 위력偉力을 보면 슬픔을 여의게 된다. 보는 자가 황금색을, 행위자를, 주인을, 인아를 브라흐만의 모태를 볼 때, 그때 지혜로운 자 되어 선악善惡을 털고 흠 없이 지고의 동일함에 도달한다. - 인도 고대 경전『문다까 우파니샤드』세 번째 문다까 제1편

진정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 진리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는『우파니샤드』- 하지만 갓밝이 새벽에 경구를 새겨보면 어렴풋이 ‘상징’이 풀려난다. 도연명이 ‘붙어 다녔다’고 한 몸과 그림자가 두 마리의 새인데 업보인 열매를 달게 먹는 현실적 자아와 먹지 않는 다른 새는 지순한 정신의 상징이다. 종당에 나무도, 두 마리의 새도 사라질 터. ‘바로 끝나야 하는’ 그 진실을 알면 근심이 사라진다는 경구이다.

해, 달, 별, 불, 물, 나, 소... 한 음절의 순우리말이 그렇듯 두 낱내도 정겹고 웅숭깊다. 하늘, 구름, 바람, 동네, 마당, 아이, 어른, 바다... 세 음절이나 네 음절의 낱말은 대개 두겹 즉 복합어나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다. 웃음꽃, 눈물샘, 먼지잼, 시부저기, 듬성듬성, 추썩추썩...

올 한 해 동안 참 많은 말을 하거나, 잊고 살았다. 그러나 나의 심중에 가장 오래 지닌 단어는 ‘나무와 새’였다. 창공을 가르는 두 날개의 새는 동시에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도 된다. 물론 나무는 있음의 나에서 무- 없음의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새겨진다. 인생천지지간人生天地間 약백구지과극若白駒之過郤(『장자』외편「지북유」)- 준마가 벽의 틈 사이로 달려가듯 흘러간 황금돼지의 해 2019년- 눈 깜짝할 사이지만 다사다난,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져 수습되거나 과제로 남았다.

불현듯 파블로 카잘스(1876-1973)의「새의 노래」선율이 들려온다. 마침내 고국 에스파냐로 돌아가 고향 땅 벤들렐에 묻힌 그 새의 비상이다, 지극히 평화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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