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구제(救濟)

1979년 12·12 오후 7시 40분, 정승화 참모총장 내외와 이재천 소령은 한남동 총장 공관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부관 황진하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그때였다.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 보고 건이 있어 공관을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남동 공관으로 대령 몇 명과 수사관들이 방문했다. 그때 수행 부관이었던 이재천 소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과의 통화를 연결 중이었다. 순간, 권총 2발이 전화를 걸고 있던 이 소령에게 발사되었다. 1발은 갈비뼈를 관통하고 다른 1발은 권총을 차고 있던 혁대를 관통, 실신하여 한남동 순천향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간이 파열되었고 소장을 절단해야 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장장 13시간에 걸친 수술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 1월 초, 나는 장군 계급장을 달고 순천향병원을 찾아갔다. 이 소령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중환자라 면회할 수 없어 병원장과 주치의의 설명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군 생활 여부는 2개월 후에나 알 수 있다고 했다. 아무런 위해를 가할 상황이 아니었다. 적을 향해서는 총 한 번 쏴본 적도 없는 수사관이 이 소령에게 총을 쏘다니,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총을 쏜 수사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전두환 합수본부장을 찾아갔다. 이재천 소령을 처벌, 전역시키겠다는 합수부 계획을 안 직후였다. 이 소령이 계속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1980년 1월 말 준장인 나는 소장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이 소령이 총격을 먼저 당한 사실, 그의 군 생활 면면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대령 황원탁 수석부관의 훌륭한 군인상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즉시 수사관 이 대령을 불러 “이진삼이 원하는 대로 해.”라고 지시했다.

합수부는 총격 사건으로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과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을 구속하고 옷을 벗기려 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이 소령이 도망을 갔다면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하지만, 목숨 걸고 상급자를 보호한 것은 용감한 정신이라 변호했고, 황원탁 대령 또한 내가 보장하는 훌륭한 후배임을 강조했다. 황 대령은 2군사령부 참모부로 보직되었다. 나를 아껴주는 2군 사령관 차규헌 대장에게 황 대령을 돌봐줄 것을 부탁드렸다.

자신이 소대장 시절에 대대장으로 모셨던 상관이 장군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제 일처럼 좋아했던 이 소령이다. 어찌 내가 모른 척할 수 있는가. 보호해야 했다. 내가 데려다 쓰겠다고까지 했다. 이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는 나의 고집으로 황원탁 대령과 이재천 소령이 순간의 위기는 면했지만, 정 총장의 수석부관과 수행부관이었다는 것으로 종국에는 예편될 것이라 예상했다. 중령 진급은커녕 장군이 될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내가 8사단에서 15사단으로 쫓겨 갔던 1973년 3월의 일을 생각하며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역 예정이었던 이재천 소령을 육군대학에 입교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 소령은 졸업 2주를 앞두고 9공수특전여단장인 나를 찾아와 “8사단 21연대 작전주임 자리가 곧 비는데 가고 싶습니다. 육사 17기 김상욱 대령이 8사단 21연대장으로 내정되어 있답니다. 저는 연대 작전주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7년 전 소대장이었던 그가 대대장이었던 내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알았다”며 즉시 의정부 한미 야전사령부에 있는 김상욱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150명 중 2등으로 육군대학을 졸업하는 이재천 소령이 있는데 내가 대대장 때 우수한 소대장이었어. 연대 작전주임으로 잘 데리고 있게.”라는 요청에 김상욱 대령은 불문곡직하고 “알겠습니다. 제가 쓰겠습니다.” 하였다. 이를 본 이 소령이 바닥에 엎드려 내게 큰절을 했다. 나는 눈물을 감추며 돌아가는 이 소령에게 교육비를 담은 봉투를 건넸다.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그의 손에 봉투를 쥐어주자 그가 큰소리로 “충성!” 하며 경례를 했다. 그런 그를 현관까지 나와 주임상사에게 차량으로 서울역까지 배웅하도록 했다. 순간 차에 오르는 이 소령의 뒷모습이 내 눈에 잡히면서 나도 눈물이 났다. 힘들었을 텐데 열심히 공부하고 버텨낸 것이 기특했다.

그 후 일주일, 이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 육군대학에서 교관요원으로 지명 차출되어 전방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이 소령에게 “괜찮아. 잘됐다”면서 독일의 롬멜 장군도 교관을 하면서 《보병전술》이란 책을 써서 초급간부들 교재로 사용하고, 적국이었던 이태리에서도 30만 권이나 팔렸던 일을 말하며 격려해 주었다.

“교관이 중요한 직책이다. 육군대학에서 최고의 모범교관으로 솔선수범하기 바란다. 다음에는 나하고 같이 근무하자.”

이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육군대학 교관을 마치고 중령이 되어 2사단 32연대 1대대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21사단장으로 있던 1984년 12월, 3군단 훈련 시범장에서 뜻밖에 이재천 중령을 만났다. 그곳에는 군단 내 지휘관 중령 300여 명과 대령 50여 명이 함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앉아 있는 이 중령 뒤에서 그의 엉덩이를 차며 “이재천 중령 아니야? 자네 지금 어디 있나?” 하고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 중령은 “네, 2사단에서 대대장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한테 들러.” 나는 많은 지휘관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인접 사단 사단장을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재천 중령의 사기를 올려 주기 위해 많은 장교들 앞에서 일부러 큰 소리로 말을 했던 것이다.

1985년 1월, 나는 격려금을 봉투에 넣어 사단 주임상사를 통해 2사단 32연대 1대대장 이 중령에게 전하고, 정보사령관으로 명령받고 21사단을 떠났다.

1987년 1월, 이번에는 내가 중장으로 진급, 전방 3군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이 중령은 대대장을 마치고 2사단 군수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군단장으로 예하 부대인 2사단을 방문했다. 방문을 마치고 헬리콥터에 오르며 사단장인 도일규 소장에게 이재천 군수참모에 대한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재천 중령, 잘 하지? 관심 갖고 잘 보살펴 주도록.”

“알겠습니다.”

내 심중을 헤아리는 사단장의 대답이었다.

1988년 7월 1일, 나는 참모차장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에게 2사단 이재천 군수참모를 아는가 물었다.

“잘 압니다. 아주 똑똑합니다.”

우수하고 군인다운 이재천 장교는 막강한 참모차장의 관심 장교가 되었다. 그가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장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의지로 위기를 극복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 유능한 장교였기 때문이다.

외롭고 연약한 자를 돕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기보다 결국 우수하고 훌륭한 군인이었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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