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발탁

나는 1978년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사단에서 주관하는 대대 ATT를 받고 있는 2대대(중령 조영길) 훈련장을 위문차 방문하고 있었다. 그때 사단장으로부터 급히 사단장 공관으로 오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테니스 하자는 호출로 알고 부대에 연락하여 운동복을 포함, 운동 준비를 하여 사단장 공관 테니스 코트로 가져올 것을 지시하고 사단장 공관으로 갔다.

“여보 61연대장, 축하해요. 배병노 장군 후임으로 사격지도단장으로 명령이 났소. 연대장 후임자는 당신 동기생 방서남 대령으로 명령 났소.”

“안 가면 안 됩니까?”

“왜?”

“연대장 임기가 더 남았습니다.”

“참모총장 특명이오. 장군 직위로 발탁 인사라고 인사참모부장과 교육참모부장으로부터 연락 받았소, 3일 후 이‧취임식 하고 떠날 준비 해야겠소.”

급한 인사 발령의 배경에는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가 대한사격연맹 총재로 지난 1978년 9월 서울 태릉에 제42회 국제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였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회 개회식에 참석, 시사(試射)를 하는 등 사격에 큰 관심을 보였다. 국제 사격대회 주최국인 우리가 개인전의 금 26, 은 28, 동 25개의 메달 중 은 2, 동 2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단체전에서도 금 26, 은 26, 동 20개의 메달 중에서 은 1, 동 3개를 획득해 개인전과 단체전 총 은 3, 동 5개의 메달을 획득하는 저조한 성적으로 주최국 체면을 손상했다. 이에 박 대통령이 몹시 진노했다.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 안보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사격을 중요시 여겨 정부 부처별 사격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시상했다. 사격대회에 앞서 직접 시사(試射)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TV,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가 대한사격연맹총재로 국제사격대회를 유치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오자 박 대통령이 이세호 참모총장을 호출했다.

“이 총장, 대육군에서 무엇하는가. 사격을 맡았으면서 어째서 메달이 그것밖에 안 되나?”

박 대통령 앞에 불려간 이 총장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북한의 이호준이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소총 3자세(엎드려쏴, 무릎쏴, 서서쏴)를 총 600점 만점에 598점으로 금메달을 딴 터라 박 대통령으로선 더욱 화가 나 있었다. 육군본부로 돌아온 이 총장은 인사참모부장, 교육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 인사운영감 모두를 불러 모았다. 배병노 준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장군을 선발, 보직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급해진 참모부장들은 준장 300여 명의 인사기록 카드를 놓고 적격 인물을 찾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적격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연대장

대령

지오피 5개월

77. 08. 04

78. 10. 17

14

20사단61연대

단장

(사격 지도단)

대령

준장

발탁(상위직)

78. 10. 18

80. 07. 29

21

사격지도단

단장(특전사)

준장

 

80. 07. 29

82. 12. 05

28

공수특전여단

사단장

소장

 

82. 12. 06

85. 01. 13

25

21사단

그때였다. 교육참모부장 채항석 장군이 “장군 중에는 없고 대령 중에는 적격자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누굽니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른 참모부장들의 눈과 귀가 채항석 장군에게 쏠렸다. 태권도, 육상 등 운동 잘하고 솔선수범하는 지휘력 있는 육사 15기 이진삼 대령입니다.”라고 하자 인사운영감 정명환 장군을 비롯한 모든 부장들이 인사기록 카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제행사에 국가대표로 참석하는데 계급이 대령인 데다가 연대장 임기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문제 안 될까요?”

“국제행사에 계급장 달고 갑니까? 총장님께 일단 보고 드립시다.”

참모부장들은 인사기록 카드를 들고 서둘러 이세호 참모총장실로 갔다.

“총장님, 문제가 있습니다.”

“뭐야?”

“대령으로 연대장 임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인사기록 카드를 본 이세호 참모총장은 말했다.

“이진삼 대령? 혹시 보안부대 특공대장으로 내가 6군단장 시절 1968년 1·21사태 때 김신조와 작전했던 장교 아니야? 애들 같은 소리 하지 마. 대령이면 어때. 임무 위주야. 사격지도단장도 지휘관이야. 장군자리로 발탁되는 것 아닌가. 연대장 20개월 이상 보직 규정은 참모총장의 명령이다. 즉시 명령 내.”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으로부터 20사단장에게 3일 이내에 이‧취임식하고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육군본부 직할부대인 사격지도단이 무엇을 하는 부대인지 잘 몰랐다. 육군본부는 연대장 20개월을 마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없도록 인사기록 카드에 ‘발탁’이라 기록하고 명령을 하달했다. 1980년 8월에 있을 제22회 모스크바 세계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라는 명령이다. 금메달은 남자 9개, 여자 4개 도합 13개 메달박스로 비중이 크다. 역사상 금메달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걸음마 어린이에게 세계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획득하라는 높은 분들……, 부딪쳐 해내는 수밖에.

 

훈련의 시스템화

사격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튼튼해야 한다. 상체는 물론 특히 하체가 튼튼해야 한다. 체력단련을 잘 시키는 체육장교를 전군에서 뽑았다. 체육대학 출신의 중위 권봉안을 선발했다. 사격연습을 끝내면 오후 4시부터 강력한 체력단련을 하도록 실시하였다. 장병들의 기본 훈련은 체력, 기술, 정신임을 강조하였다. 대령 반준석 부단장에게 급식과 특식 등 보급문제에 신경 쓸 것을 지시하는 한편, 단장인 나는 총기와 장비 관리, 훈련, 담력 향상, 체력 관리, 수면 관리, 유명한 외국 코치 초빙, 형이상학적, 형이하학적 모든 기법을 적용하는 등 성적 향상에 집중했다.

사격, 골프, 궁도 등 자신과 싸우는 운동은 단체 운동과 달리 담력이 강해야 한다. 집중력과 인내심 그리고 끈질긴 개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종목이다.

일일 주간 단위로 사격 연습한 결과를 훈련장 입구에 써 붙이게 하여 개인별 관리를 했다. 정신적 안정을 위해 녹음테이프, 음악, 성경, 찬송, 기도 등을 개인 방마다 틀어주어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게 했다. 특히 외국에서 개최된 국제시합의 경우 시차로 인한 수면부족과 불안감 해소를 위한 취침 녹음테이프 청취는 메달 획득에 큰 성과를 올렸다. 지금은 그런 모든 것들이 당연시 됐지만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훈련 방법이었다. 때로는 스파르타식 지옥훈련을 했다. 배구, 탁구, 야구와 같은 근육을 흔드는 운동은 삼가도록 하는 등 체력단련도 방법을 이전과 달리했다. 감독, 선수 혼연일체, 신명나면서 능률이 오르고 사기도 오르면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로 눈에 보일 정도로 성적이 향상되었다. 부대 전 장병 모두 자기 책임하에 경쟁적으로 열심히 목표를 향하여 뛰었다.

 

국제 대회 참가

사격지도단을 이끌고 제일 먼저 국제 대회에 참가한 것은 1978년 12월에 열린 ‘8회 방콕아시안게임’이었다. 박종길 준위가 국제대회 최초로 속사권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 1, 은 2, 동 6개 등 총 9개를 획득 종합 3위를 했다.

1980년 1월에 있었던 제4회 필리핀 마닐라 선수권대회에서는 12개국 중 금 9, 은 17, 동 5개 등 총 31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2위를 하는 등 성적은 계속 향상되었다. 1980년 9월 일본 아세하라 국제대회에서는 서독, 일본, 중공, 미국을 제치고 1위를 하는 등 국위를 크게 선양했으며, 1981년 4월 멕시코 베니토후아레스 국제사격대회에서는 21개 참가국 중 종합 4위를 획득했다. 그러나 우리가 심혈을 기울인 1980년 8월 제22회 모스크바 세계올림픽은 공산주의와의 냉전으로 미국, 영국 등 자유 우방과 한국의 불참으로 81개국만이 참가하는 21개 종목 반쪽 대회가 되었다.

미래의 영광과 희망 모두를 선수와 코치 등에게 맡기고 보람과 아쉬움을 남긴 채 1980년 7월 육사 4년 선배 한일수 장군(육사 11기)에게 인계하고 제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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