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이야기] '한국적인 삶’을 위하여
[김래호 작가의 밑줄이야기] '한국적인 삶’을 위하여
  • 김래호 작가
  • 승인 2019.10.0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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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자연이 손짓해서 부르는데 누가 안한하여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새해가 찾아와 봄이 발동되면 즐거운 감정이 넘치고, 타는 듯한 초하에 이르면 의기가 꺾여 위축된 마음이 생긴다. 하늘 높고 공기 맑은 가을이 되면 음침한 생각이 깊어만 가고, 진눈깨비 뿌리는 겨울이 되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엄숙한 사고로 침잠된다. 계절 따라 각각의 풍물이 있고, 풍물 따라 또 갖가지 모습이 드러난다. 하나의 낙엽도 마음  속에 암시를 줄 수 있으며, 벌레 소리도 마음을 끌기에 족하다. 감동이 자연에의 선물이라면 시상은 마음에의 보답과 같은 것이다. - 중국 남조 문필가 유협(465-522).『문심조룡』권 10「자연풍물과 사실」     

문학의 4대 갈래는 시, 소설, 희곡, 수필이다. 이를 4계절에 비유해 보면 시는 틀림없이 겨울이다. 그 많던 잎들 죄다 떨구고 앙상한 졸가리의 나목- 그곳이 어는 곳이든 또한 낮과 밤 어느 때이든 그런 나무에 눈길이 머문 감상자는 상상한다. 새잎이 돋아나는 봄철의 설렘과 장맛비에 젖고 태풍에 흔들리던 여름날. 그리고 시간을 더해 단풍들던 가을의 침착한 햇살을 떠올린다. 시는 수직과 수평적 생각이 만나 더덜없는 이미지로 지어진다. 독자는 교차점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확장하며, 갈 길을 찾아 새로운 ‘봄’을 여는 것이다.  

물론 소설은 여름을 닮은 장르다. 무성한 잎들의 나무처럼 어떤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이 이야기하느라 분주하다. 때때로 입을 모아 작년보다 거름이 적다거나, 비가 많이 내려 일조량이 줄었다고 떠드는데 이는 가족이나 사회 그 외부적 환경에 대한 푸념일 터. 뿌리와 우듬지부터 하나의 나무는 소설 한 편과 동일한 풍성함 속에 읽히는 것이다. 여기에 견주어 무대가 전제되는 희곡은 꼭 봄철의 메마른 들판 같다. 황량한 그곳에 불씨가 날라와 들판은 점차 거센 불길에 휩싸인다. 관객들은 배우들이 갈등을 눈앞에서 펼치는 동안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꺼지기를 기다린다. 

거만한 인간. 가을 들판에 피어오르는 연기. 숲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털. 벼락부자가 되어 자동차에 앉아 있는 여인의 가녀린 좁은 어깨. 줄타기 묘기에서 세 차례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먼지 낀 서류에 뭔가 기록하고 있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몇 구절 시구.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뒤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꽃 피는 나뭇가지로 떨어지는 눈발...... 이 모든 것은 우리들 가슴에 스며들며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안톤 슈낙. 수필「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마지막 문단  

문학의 4대 장르 중에서 수필은 가을이다. 일찍이 금아 피천득(1910-2007)이 규정하셨다. 수필은 “36살 중년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어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덧붙여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탄식했다. ‘하루는 작은 일생’이라는 비유가 온당하다면 사계절의 1년은 좀 더 큰 일생인데 가을은 중년을 넘은 오후의 시작임이 분명할 터. 어찌 치열하게 살아온 ‘봄과 여름’의 회억이 없겠는가? 현대적 분류의 퍼스널, 오피니언, 여행의 에세 그 어느 편이든 할 말과 쓸 글이 없을 리가 만무하다. 그냥, 그저 그런 소회를 적어나가면 충분하다. 

말하자면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게 일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단 일었다 하면 온갖 구멍이 다 요란하게 울게 되지. 산림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얻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지. 그게 바람이 불면 울리기 시작해. 콸콸 거칠게 물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 나는 소리, 나직히 나무라는 듯한 소리, 흐흑 들이키는 소리, 외치는 듯한 소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 새가 우는 듯 가냘픈 소리... 산들바람에는 가볍게, 거센 바람에는 크게, 태풍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고요해진다네. -『장자』제2 제물론 

초나라의 사상가 남곽자기가 하늘을 우러르며 후 길게 숨을 내쉬자 제자인 안성자유가 여쭈었다. 예전 모습과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렇게 보이느냐? 나는 지금에서야 나를 잊어버렸다.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만 들었지 땅과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우화에서 ‘구멍’은 인간과 사물의 덧없음을, 소리는 시비를 일삼는 사고나 언설을, 바람은 실체가 없는 우주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바람장’은 인간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시시비비 논란의 문학적 표현으로 천하의 명문이 아닐 수 없다. 묶어 보면 인간의 아홉 개 구멍은 그런 바람 즉 외부에 휩쓸리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망아忘我의 소리통이다. 

가을은 그 ‘소리통’을 어떻게 울리고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성찰의 계절이다. 자신의 고음과 저음은 적절했는지, 타인과 불협화음은 없었는지, 끝없는 욕망의 외마디만 내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화와 균형적인 중용의 삶을 진정 살아내고 있는지. 가을은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서쪽, 오행의 금金, 인성의 의義를, 숫자로는 4와 9를 표상하는 계절이다. 봄과 여름에 들판을 가꾸고 추수를 하듯 지난날들에 대한 심판과 보상을 받는 절기인 것이다. 삶은 외경스럽고 엄정한 것. 마땅히 가을은 나목처럼 비우고, 내리며 작고 낮고 느리게 자신을 돌아보는 때이다. 
   
내 딸을 두 팔로 안았다. 죽은 나무를 얼싸안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는 세상 꼭대기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허무의 끝에 서 있었다. 내 가족 모두를 생각했다. 그 의혹의 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나에게 어떤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 - 장폴 뒤뷔아. 장편소설『프랑스적인 삶』9. 자크 시라크 마지막 문단 

번역본으로 정확히 393쪽에 이르는 이 소설은 프랑스 제5공화국의 샤를 대통령부터 7대 자크 시라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변동 속에 54세 폴 블릭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드골 장군과 함께 한 유년의 뜨락부터 기록된 ‘프랑스적인 삶’은 행복과 불행 그 씨줄과 날줄의 피륙이다. 우상이었던 형을 먼저 보내고,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처에게 배신을 당하고, 정신착란에 빠진 딸을 보살피며 사는 중년의 사내- 그는 동생, 아들,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로 이름표를 바꿔 달며 치열하게 살아냈다. 그렇다고 정치적 변화에 크게 기여하거나 멀리하지도 않고 ‘한 번도 투표를 하지 않고’ 그저,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프랑스의 나무』라는 책에 실린 사진가가 되었다.  

물론 우리들의 기억과는 아주 다르지만 이 나무들은 그들 풀밭의 역사와 먼 도시에서 웅성거리는 주파수를 기록할 수 있는 기억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로서는 나무들도 우리가 내세우는 것만큼이나 아주 섬세한 세상의 지혜를 소유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처럼 나무도 아무것도 아닌 무에서, 우연과 결합된 필연에서, 바람이나 새가 실어다 준 소박한 씨앗 한 톨에서 그들의 운명을 구축하는 것을, 그러고 나서 땅의 소금과 빗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 장폴 뒤뷔아. 장편소설『프랑스적인 삶』6. 프랑수아 미테랑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조국이 온통 ‘조국’ 뿐인 나라가 되었다. 일속산방의 중늙은이로 ‘프랑스적인 삶’의 폴 블릭 닮은 삶을 살아가지만 이제 본래의 모국다운 모습으로 돌아오길 소망해 본다. 가장 좋다는 상달 그 10월의 초입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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