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진급심사

대령 진급심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심사위원 명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화로 여기저기서 알려왔다. 위원장 양원섭 소장을 비롯하여 전두환 준장, 김재명 준장, 우종림 준장, 나동원 준장, 김영동 준장, 배성순 준장 등 7명의 장군이 심사위원이었다.

진급발표 후 감찰감 양원섭 장군 방에 차규헌 소장, 전두환 준장 셋이 모여 전화로 나를 불렀다. 진급심사위원장이었던 감찰감 양원섭 장군이 말문을 열었다.

“이 중령, 내가 대령 시킨 거 아니야. 이진삼 기록카드를 들고 모든 위원들이 진급시켜야 한다고 해서 제쳐 놓았어. 만약 안 되면 위원장 직권으로 진급시키려고 했어. 그런데 인민군을 육박전으로 때려잡았다고 하면서 이진삼 중령은 모두가 진급시켜야 한다고 하더군. 그나저나 웬 무공훈장이 그렇게 많은 거야.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모두 우등, 지휘관을 많이 했고, 교육기관 훈육관을 했으며 참모생활은 보안사령부 인사과장과 육군본부 전투교리발전장교뿐이더군.”

중위로 중대장(대위)부터, 특히 대령으로 사격단장(준장) 등 매 직위마다 상위계급 직책을 수행했다. 특히 보안부대 등 비정규군 부대에선 진급이 어려웠으나 다행히 보안사령부 재임 중 소령에서 중령을 3년 만에 특진한 것은 능력 없는 나로서는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진급할 수 없는 부연대장이란 별 볼 일 없는 직책이었던 내가 대령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외국 출장 중이었던 군수참모부장 이범준 장군은 군수참모부 김영동 준장이 대령 진급심사위원에 선발되었다는 소식에 영국에서 술 한 잔을 하고, 심사위원장으로 양원섭 장군이 결정되자 또 한 잔을, 한국에서 날아온 나의 진급소식에 프랑스에서 또 한 잔을 했다고 했다. 이범준 장군은 출장 전, 이세호 참모총장에게 대령진급 심사위원으로 보급정비차장 김영동 장군을 부탁하고 떠났었다. 귀국 후에는 기분이 좋다며 당시 시청 옆 일식집 ‘이학’으로 나와 김영동 장군을 불러 축하해주었다. 보안부대 재직 시 이범준 장군은 베트남에서, 김영동 장군은 사단에서 모셨던 적이 있다. 심사위원 장군들 대부분이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냈던 분들이었다. 신의의 관계였으며 아껴주던 분들로 지금 생각해도 눈물겹도록 고맙다. 많은 선배 가족들은 진급할 때마다 이순자(전두환 영부인) 여사와 김옥숙(노태우 영부인) 여사는 이구동성으로 말을 모았다.

“장군님은 도대체 산소를 어떻게 썼기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도 살아나신대요? 진급도 선두 주자로 하고 대단합니다.”

나는 “이 모두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라고 답했다.

 

축하하는 사람들

진급발표를 앞둔 1974년 9월, 육군본부 청사 안은 조용했다. 오후 3시, 마침내 진급 발표가 났다. 여기저기서 걸려온 축하 전화로 전화가 불통되자 사무실로 직접 찾아와 축하해주는 이들도 많았다. 내가 대령으로 진급되자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나는 다짐했다. 더 열심히 군을 위해 노력을 하겠다고.

학창 시절엔 우등 한 번 못 한 나였지만, 임관 후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노력해야 한다는 각오로 전술학, 학술학, 지휘통솔 등 보병을 비롯해 전투와 관계되는 포병, 기갑, 통신, 공병, 전사, 군사학 등을 쉼 없이 공부했다. 사단 보안부대장, 대대장,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에 이르기까지 남모르게 공관에서 매일 2시간씩 공부했다.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육대 교재를 사전에 획득, 공부한 것이 1~2등의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보병학교 생도대 훈육관 시절, 우리 군에 맞는 신총검술 교재를 제작하였고, 보안부대 특공대장 3년간 적 특수부대 전술교리 대간첩, 대침투, 대전복, 교리를 연구하여 교범을 작성 전파하기도 하였다. 특전사 9공수여단 참모장과 단장 시절에는 특공무술 참호격투, 비정규전 교리 발전을 위해 연구했다. 또한 사단장 임무수행을 위해 포병, 기갑, 통신 항공 교재를 탐독하고 전투병과 학교 후배 중 교관이었던 후배들을 불러 배우기도 했다.

대간첩, 무장공비 소탕 등 일촉즉발의 순간들, 부연대장으로 쫓겨났으나 당당하게 살아야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눈물의 빵’을 먹어봐야 인생을 안다고 했다.

귀성부대 참모장의 오기(傲氣)

1974년부터 육군본부에서 13개월간 계획발전장교를 마치고 발령 난 곳은 노태우 장군의 요청에 의한 9공수여단 참모장이었다.

당시 육군에는 공수특전 7개 여단이 있었다. 내가 9공수여단 참모장으로 갔을 무렵은 창설된 지 1년이었으나, 여단장을 보좌하며 ‘부대의 우열은 간부의 우열에 비례한다.’는 말을 교훈 삼아 일신 또 일신하며 부대의 정예화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면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부대로 변모하였다.

9여단의 닉네임이 귀성(鬼星)으로, 어느 날 여단장으로부터 부대 앞에 귀성부대라는 표지석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마땅한 돌을 찾기 위해 부평 미 공병 대대장에게 부탁, 최신장비 기중기와 불도저 운반용 트레일러를 끌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큰 돌을 발견한 곳은 파주에서 가까운 북노고산 지역으로 습지대였다. 문제는 그 돌을 어떻게 빼내느냐였다. 기중기의 발톱으로 누르고 빼려고 했으나 습한 지형으로 기중기를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을 시켜 돌과 모래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심야작업을 했지만 돌을 빼낼 수 없었다. 실패하고 귀대했다. 이를 본 여단장 노태우 장군이 내게 말했다.

“참모장도 불가능한 게 있구먼.”

그 소리에 나는 약이 바짝 올랐다. ‘3개월만 기다리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돌을 반드시 끄집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땅이 꽁꽁 어는 2월까지 기다렸다. 기중기 발톱이 중량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발톱 밑에 철판을 깔고 돌을 빼내 미 공병 트레일러에 싣고 왔다. 이를 본 노태우 장군은 혀를 내둘렀다. “참모장 오기에 두 손 모두 들었다”고 말하기에 “여단장님, 제가 오기(傲氣)가 있어 육사 오기(五期)로 들어갔습니다.” 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자 노태우 장군은 “그래, 악수 한 번 하자. 노력에 비하면 악수 한 번은 너무 약소하지!”라며 웃었다.

9공수여단 정문에는 귀성부대 표지석이 40여 년간 우뚝 서 있다.

 

9공수특전 여단장

참모장을 마치고 다시 그곳을 찾아 근무하게 된 것은 3년 11개월 후, 장군이 되어서다. 3대 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하여 1980년 7월부터 1982년 12월까지 28개월간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때의 9공수여단은 미 1군단에 작전 배속되어 그들의 훈련과 작전 계획 개발에 참여했다. 미 1군단 전면의 적 후방 16㎞까지 종심(縱深)을 갖고 그 지역 내에 있는 적(敵) 부대의 병참시설, 탄약고, 도로 등을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군에 있어 승리의 첫째 요소는 평소의 강인한 훈련에 있다.

매년 실시하는 중요한 훈련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대대별로 하는 천리행군을 포함한 특수 훈련이고, 다른 하나는 한미군이 합동으로 실시해 온 포울 이글(후방지역 작전)이다. 육체적 한계점을 여러 차례 극복해야 하는 훈련으로 강한 의지와 인내가 필요한 훈련이다. 여러 차례의 한계상황 고비를 극복하고 부대로 복귀하는 장병들의 눈을 보면 자긍심으로 번쩍거린다. 군에서 가장 힘든 훈련이 천리(400km) 행군이다. 나는 수시로 훈련장을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생존 훈련은 적 후방 산악지대에서 보급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훈련으로 때로는 뱀을 비롯하여 각종 곤충과 야전 식용식물 등으로 연명해야 한다. 생존 훈련장을 방문하면 진기한 장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훈련장을 찾아 그곳에 은거하고 있는 대원으로부터 생존훈련 상황을 브리핑 받으며 땅에 묻어 놓았던 독을 열어보면 개구리와 뱀, 지네 등이 가득했다. 여러 가지의 약초를 채집해 놓기도 했다.

“특전부대 용사들, 이것을 먹을 수 있는가?”

“네, 모두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식사 대신 몸보신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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