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칼자루 쥔 강창성

육사 8기 윤필용 장군과 동기생 강창성 장군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평상시 표면화되진 않은 상태였다. 많은 선배와 후배들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갔다. 윤 장군과 친할수록 더욱 그러했다. 윤 장군이 아끼던 육사 11기 권익현(보안사), 손영길(수경사참모장)을 비롯하여 12기 정동철(보안사), 이광근(보안사), 13기 황진기(보안사 인사과장), 신재기(육본진급과), 14기 배명국(보안사 인사과장), 박정기(수경사 비서실장), 그리고 15기인 이진삼(보안사 인사과장)을 포함했다. 이 사건으로 총 8명이 전역조치 되었고, 15기인 나는 전역되지 않았다. 내가 윤필용 장군의 심복으로 알려져 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의당 전역조치 될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격오지 전방 15사단 38연대 부연대장으로 쫓겨 갔다. 전역된 대부분의 장교들은 수도권에 보직되었던 수도경비사령부 2명, 보안사령부 5명, 육군본부 1명의 주요직위자 8명이었다.

윤 장군이 기분파여서 군대가 잘 되려면 육사 출신들을 키워야 한다고 후배들을 아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서울 근처 지휘관이나 참모 등 주요직을 가졌다는 점에 대한 반성은 필요했다. 후배들을 어려운 직책을 수행토록 하고 훈련시켜 야전성 있는 군인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서울 근처를 떠나는 보직을 주어 경험을 쌓도록 유도하고, 본인 스스로도 솔선수범을 했어야 했다. 동창과 각기의 동기생 간에도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어쨌든 강창성 장군은 본인 의도와는 달리 이런 선후배 간의 관계를 과장해 발표함으로써 여론을 오도했다고 본다.

윤필용 장군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던 박 대통령도 강 장군이 이처럼 사건을 확대해 많은 유능한 장교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알고는 조사를 중단시키고 그를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켰다. 박 대통령의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더 많은 장교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강창성 장군은 서로가 자연인으로 돌아갔던 1993년 가을, 지난 과거사를 언급했다. 보안사령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60년대 후반에 이 대위라고 보안사에서 특공대장으로 있었어. 아직도 있나?”를 물어와 “중령으로 진급해 육군대학 졸업 후 본인의 희망으로 야전부대에 나가 전방 대대장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1973년의 ‘윤필용 사건’이 있었을 때, 대통령 관심 사항으로 내게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그때의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던 것도 박정희 대통령의 끊임없는 관심 덕분이었다.

윤 장군은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1973년 4월 28일 열린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업무상 횡령, 근무 이탈 방조 등 8개 죄목을 적용받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가 당하게 된 이유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윤 장군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들이 나돌고 심지어는 삼각지(국방부나 육군본부)보다 필동(수도경비사령부)이 더 세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내가 윤 장군 이었다면 수경사령관 직책을 사양했을 것이다, 지난 보안사령관 자리도, 맹호사단장 자리도. 참모들 가운데 누군가가 적색경보를 강하게 울려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처신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는데 아무도 이를 챙기지 못했다. 나는 그 전에 이와 관련하여 바른말을 하긴 했으나 좀 더 강력하게 하지는 못했다. 내가 잘나고 자랑하고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대로 위험한 직책 그리고 어렵고 험한 지역 군 생활을 택한 것은 사실이다. 말로 하는 애국애족, 필사즉생, 위국헌신 군인 기본자세 표어보다 몸소 실천이 중요하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쫓겨 가는 신세

1973년 3월 29일 8사단을 출발 29일 15사단 부임을 명령 받았다. 후임자도 없는 초라한 이임식, 자랑스러운 대대 장병 여러분 우리는 국가보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언젠가 여러분도 3대대를 떠난다. 그러나 승리의 3대대 영원무궁할 것이다. 나는 당당하게 대대원들의 환송도열을 지나면서 병사들 울음소리에 나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를 따라오던 진돗개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로 15사단 부연대장으로 쫓겨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사단장에게 신고를 해야 했다. “전출 신고합니다.”를 하자마자 박노영 사단장은 신고를 생략하고 내 손을 꽉 잡으며 앉으라고 했다. 내가 자리에 앉는 순간 인사참모가 퇴장하고 당번병이 커피 두 잔을 놓고 나갔다. 둘은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있다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사단장이 먼저 눈물을 닦으며 휴지 한 장을 빼 나에게 건넸다.

“시간이 없어 식사도 못 하고 떠나보내게 되어 섭섭하다. 누가 뭐래도 이 중령은 우리 사단을 빛냈다. 야전군 사격대회와 태권도 최우수 부대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과를 올리는 것에 애 많이 썼다. 3개월 전, 연대장 노태우 대령이 육군본부로 떠나면서 이 중령 부탁을 하고 떠났다.”

그 말에 나는 “그간 특별 배려해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사단장이 책상 위 책을 내게 건네며 “읽어 봐라”고 했다. 책 안에는 우리가족 앞으로 쓴 편지와 함께 촌지가 들어 있었다.

15사단은 전방 중에 최전방이다. 부연대장으로 갔으니 당연히 진급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경비사 참모장이었던 준장 손영길이 3일 전, 15사단 부사단장으로 명패만 남기고 연행된 방을 보면서 며칠 내에 나도 그런 신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사단 내 참모 지휘관 모두가 나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듯 했다. 나는 애써 당당함을 보였다. 하지만 최고회의 박정희 장군의 전속부관이었던 11기생 중 1차로 장군을 달아 시쳇말로 ‘끗발 좋다’던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장군이 구속영장도 없이 붙잡혀 간 마당에 중령인 나를 시한부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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