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성(전 대전시 일자리특별보좌관)
손규성(전 대전시 일자리특별보좌관)

“폭스바겐이 국내에 신설 자동차 자회사를 만들어서 5,000명의 실업자를 5,000마르크의 급여를 주는 정규직으로 채용하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동의할 수 있는가?”

1999년 말 독일의 자동차 회사 폭스바겐의 인사노무 담당이사 피터 하르츠는 이런 내용을 노동조합에게 전격 제안하면서 동의를 요청했다. 이른바 혁신적인 생산방식 도입으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노사 모두가 상생하자는 이른바 ‘아우토(Auto) 5000’ 모델의 출발 선언이었다. 

독일 자동차산업은 1990년대 들어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높은 노동비용과 낮은 생산성이라는 전형적인 고비용 저효율의 병폐를 안고 있었다. 일본은 물론 한국 자동차업체의 저가경쟁도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었다. 또 자동차산업의 글로벌화에 따른 해외현지생산이 본격화됐다. 여기에 독일 통일이라는 특수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중소형차를 주로 생산하는 폭스바겐은 그 피해가 더욱 심각해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만 했다.

폭스바겐 경영진이 제시한 월 5,000마르크는 당사 폭스바겐 노동자의 임금보다 20% 적은 수준이었다. 노조가 선뜻 받아들이기엔 이렇게 곤란한 사항들이 있었지만 ‘아우토 5000’ 모델은 우여곡절 끝에 2001년 8월 극적으로 타결돼 실행에 옮겨졌다.

이 아우토 5000 모델이 바로 올해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가 도입한 ‘광주형 일자리 창출모델’의 원형이다. 노·사·민·정이 모두 참여한 광주형 일자리 창출 모델은 20일 자동차 공장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총회를 열고 본격 출범한다. 광주 빛그린산업단지에 오는 12월 연 10만대 규모의 생산라인 구축을 위한 공사에 들어간다. 정규직 1천명을 고용할 예정인 이 합작법인은 2021년부터 경형 스포츠유틸리티 차량을 현대차로부터 위탁받아 생산하게 된다.

광주형 일자리 창출모델은 지역사회가 앞장서 기업과 협력해 적정임금과 적정노동시간 등을 지키면서 높은 생산성 유지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가는 지역산업발전형 일자리 공유모델이다. 노동은 저비용을 감수하고 광주광역시는 부족한 임금 대신 정주 및 교육여건 등 사회보장을 약속하는 사회통합형 기업모델이다. 지속가능한 고용안정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 인간화된 도시를 추구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런 지역상생형 또는 노·사·정 협력형 일자리 창출모델은 구미, 강원, 울산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대전의 인구는 여전히 줄어들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비율로 감소하고 있다. 지난 7월 30일 통계청이 발표한 ‘6월 국내인구이동’에 따르면 이달 인구 순이동률은 대전지역 -1.3%, 세종지역 6.2% 등이다. 5월에도 –1.0%를 기록했다. '인구 순이동률'은 주민등록인구(거주자) 100명당 이동자 수로, 마이너스(-) 수치를 기록할 땐 총전입보다 총전출이 많아 인구가 순유출 됐다는 의미다. 대전지역의 순이동률(-1.3%)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마이너스(-) 수치이다. 인구의 유출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다는 뜻이다. 자연감소가 아니라 인위적인 유출이 가장 높다는 뜻이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일자리 등 안정적인 정주여건이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하르츠의 아우토 5000 모델 제의는 대전과 비슷한 지역산업동향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독일 노동시장 전문가 이상호 박사는 자신의 저서 <독일의 일자리혁명>에서 지역산업의 쇠퇴는 고용자 감소 추세를 동반한 지역사회의 위기임을 지적하고 있다. 폭스바겐 본사가 있는 볼프스부르크 공장의 생산량은 1989년 88만 6,000대에서 2001년 54만 1,000대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피고용인 수도 61,300명에서 51,450명으로 약 15%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 생산차종이던 폴로(Polo)는 비용경쟁력 때문에 스페인 팜플로나 공장으로 생산기지가 이전되었다. 지역산업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위기였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가 경영진이나 노조 모두에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우토 5000모델은 이런 상황에서 나와 노사 모두가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모델은 다소 다른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후 하르츠는 슈뢰더 총리의 ‘적극화 노동시장정책’을 뒷받침하는 국가노동시장개혁위원장으로 발탁돼 이른바 ‘하르츠개혁’의 주역이 된다. 독일의 실업률은 한때 8%까지 떨어졌다가 2000년 초반에는 10%를 넘어서고 이런 고실업상태는 2005년 11.7%까지 치솟아 정점을 이룬다. 이후 줄어들어 2019년 3월 현재 3.5%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일자리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한때 ‘유럽의 병자’로까지 일컬어지던 독일은 하르츠 개혁 등을 통해 ‘고용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대전시는 일자리 창출과제가 지지부진하자 19일 김재혁 전 국가정보원 대전지부장을 ‘경제전문가’라며 정무부시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국정원 근무당시 경제단장을 지내고 대외경제연구원에 파견근무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야당은 물론 시민단체들은 무리가 있다며 임명에 동의는커녕 내정철회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김 부시장은 국정원의 임무와 성격상 경제부처나 기업 등에서 동향 파악을 하거나 첨단기술 해외유출 방지 등의 기술보안 업무를 주로 했을 것이다. 그런 경력을 경제전문가라고 포장한 것은 너무 과도한 게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동의받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금의 대전 상황에서 김 부시장의 역할에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국내외 기업동향이다. 어떤 기업이 어떤 분야에 신규로 투자하고 이를 위한 제반 시설을 어느 지역에 건설할 것인가 등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중요하고 유용할 수 있다.

산업계 동향과 기업정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경북 구미시의 일자리 창출모델을 꼽을 수 있다. 구미시는 지난 7월 25일 LG화학과 함께 5천억 원을 들여 구미국가산업단지에 전기자동차 2차 전지의 핵심부품인 양극재 공장을 짓기로 했다. 구미시는 6만여㎡ 땅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보조금과 각종 세제혜택 등을 제공하는 한편, LG화학은 2024년 공장을 완공한 뒤 1천여 명을 고용하기로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애초 LG화학은 생산시설을 해외에 짓기로 하려던 것을 지자체와 정부의 설득으로 구미로 투자처를 바꾼 점이다. 자자체가 산업계 동향과 기업정보에 민감했기에 설득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대기업의 산업입지가 거의 없는 대전 상황에서는 강원형 일자리 사업을 눈여겨볼 만하다. ‘이-모빌리티’(전기차) 기반의 ‘강원형 일자리’ 사업은 중소기업이 협업해 소형 전기화물차를 생산·판매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모델이다. 현재 관련 부품업체 8곳이 참여하고 있으나 참여 중소기업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광주형(현대자동차), 구미형(엘지화학) 등은 대기업을 파트너로 삼았지만, 강원형 일자리는 중소기업 중심의 상생 모델이다. 대기업은 없지만, 어느 지역보다 기술력이 검증된 강소기업과 벤처기업이 많은 대전으로서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 모형이 될 수 있다.

일본과의 경제전쟁 대응책으로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국산화 대체가 화두가 되고 있다. 내년도에는 국가 R&D 예산 투자가 22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런 국가과제 가운데 상당 부문이 대덕연구단지의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경제 전문 부시장의 영입이 이뤄진 만큼 그의 업무가 대덕연구개발 특구와 연계한 일자리 창출 설계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다른 지역들이 줄줄이 추진하는 일자리 공유사업을, 막강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분야가 많은 대전이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2019. 8. 20. 전 대전광역시 일자리특별보좌관 손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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