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공수부대 마크가 아깝네

1970년 10월 15일, 소령으로 8사단 보안부대장에서 보안사령부 인사과장으로 명령을 받았다. 1970년 10월 14일 오전 이‧취임식을 마치고 나자 5군단 보안부대장 김원태 대령이 내게 5군단장에게 인사드리고 떠날 것을 제안했다. 신고나 인사를 꼭 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역 군단장을 예의상 찾아보기로 했다. 당시 군단장은 이병형 장군으로 6·25전쟁 때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군단장은 사단 보안부대장이 어디로 가든 관심 없는 직책이다. 군단장이 식사하러 갈 때 식당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인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비서실장의 귀띔대로 나는 식당 입구에서 군단장을 기다렸다가 인사를 했다.

“저는 보안사령부 인사과장으로 발령 받아 오늘 떠납니다.”

그러자 이병형 장군은 내가 입고 있는 전투복의 가슴에 달린 공수 마크를 가리키며 “자네는 공수부대 마크가 아깝네.”라는 뼈 있는 한마디를 하며 악수를 하고는 “식사하고 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수부대 훈련 받은 육사 출신의 장교가 전투부대에 있지 않고 보안부대에서 근무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지휘통솔 지침에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비꼬는 언사를 하지 않도록 명시되어 있다. 너무했다 싶은지 몇 걸음 떼던 군단장이 걸음을 멈춰 “밥 먹고 가지”라며 식사할 것을 권했다. 5군단 보안부대장과 함께 이동 갈빗집으로 갔다. 부대 식당에서 먹게 되면 대령까지는 장군 자리에서 같이 먹을 수 있지만, 소령인 나는 구석에서 따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동갈비를 먹고 헤어진 다음 22년의 세월이 흐른 1992년 7월, 예비역 이병형 육군 중장을 만났다. 내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할 때였다. 그는 용산 육군본부 자리에 전쟁기념관 건설사업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원들과 도열, 맨 앞에 서서 반갑게 맞이했다. 내가 먼저 “어인 일이십니까?” 묻자 그가 “장관님 오신다고 하니 당연히 나와 봐야죠.” 하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무섭던 분이……. 그는 전쟁기념관을 안내했다. 내가 안보전시관을 만들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치자, “기념관의 학예사들을 비롯한 전문 인력이 있으니 뭐든 연락하면 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런 옛 상관을 보면서 옛 일을 떠올렸다.

1972년 보안사 인사과장을 끝으로 나는 이미 계획했던 대로 대대장으로 나갔다.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8사단 21연대 3대대장으로 나가면서 군단장 이병형 장군의 말대로 전투지휘관이 된 것이다. 그가 군단장일 때 노태우 연대장은 대령으로 그의 부하였다. 대통령이 된 옛 부하 대령(8사단 21연대장) 노태우는 예전의 5군단장 예비역 중장을 전쟁기념관 건립 책임자로 임명했다.

 

군기반장

1968년 10월 소령이 된 후 3년 만에 1971년 10월 중령 예정자가 되었다. 1971년 3월 소령으로 보안사령부 인사행정과장으로 명 받았다.

인사행정과장은 보안사령부의 기율(紀律)을 담당하는 군기 담당자다. 일개 소령인 나를 김재규 사령관이 모처로 불렀다. 그러고는 내 앞에 편지 한 통을 꺼내놓으며 읽어보라고 했다. 보니까 ‘친애하는 김재규 장군 귀하’로 시작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자필 편지였다. 나는 잠시 시선을 떼어 김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나와는 좀체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사령관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였다. 그러자 그가 턱짓으로 계속해 편지를 읽으라는 신호를 했다. 시선을 돌려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전방 지휘관인 모 장군이 외출을 나와 박 대통령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장군들이 외출을 나오면 불러서 식사도 하고 촌지 주는 것을 즐겨했다. 식사 자리에서 박 대통령에게 애로사항을 털어놓게 되었다. 전방에 있는 보안부대원들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것으로 지휘관들을 괴롭히고 있어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모 사단장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김재규 사령관에게 이것을 시정하길 바란다는 편지 내용이었다.

김 사령관은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고 물었다. 순간 나는 나보다 계급이 높은 대령들이 많이 있음에도 그들을 놔두고 나에게 지시한 이유를 잠시 고민했다. 특히 자신의 경쟁자 윤필용 장군이 나를 총애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문제를 의논해온 것은 나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게 인사과장을 발령 냈던 이유와 부합된다고 여겼다.

“시정해야죠.”

“어떻게? 당장 부대장들을 사령부로 집합시켜?”

“사령관님, 그건 안 됩니다. 지금 집합하라는 명을 내리면 왜 오라고 하느냐로 세상이 시끄러워집니다. 지난번에 8사단의 책 사건이 있을 때 저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전부 불러오면 시끄러우니까 제가 책임 있는 과장들을 불러 교육하고, 대통령의 편지를 교육하고 전달하는 것으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요원들 모르게 인사조치 하겠습니다.”

물론 이때 보안처장이나 정보처장, 대공처장, 그리고 나의 직속상관 행정처장을 불러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과장인 나를 불러 의논한 것은 김 사령관의 속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를 공정하고 빠르고 슬기롭게 처리할 것으로 인정한 것으로 판단한 나는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문제는 시행에 옮기는 겁니다. 감사실에 지시하지 않고 제가 직접 조사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하고 전 부대 기율을 확립하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긴장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역시 이진삼 과장이야. 군인으로서 판단이 명석하구먼.”

그러면서도 김 사령관은 나의 대답에 당황한 게 역력했다.

잠시 샛길로 빠져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김 사령관 표정은 나를 헷갈리게 했다. 그런 표정을 지닌 사람이 1979년 10·26사건과 같은 일을 저지를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마사태와 한미관계, 차지철 경호실장의 처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분명 부마사태와 한미관계에 대한 보고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하는 과정에서 차지철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차지철의 김재규 선배에 대한 불경과 건방진 행동이 최악의 사태를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군사영어반 대선배 장군 출신의 비서실장 김계원과 2기생인 정보부장 김재규와 만나서 대위 출신인 차지철의 행동에 불만을 토로하는 등 동조하면서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김계원 실장과 김재규가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쩌면 부마항쟁이 4·19보다 더 큰 사태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이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차지철이 부마사태에 대하여 “캄보디아에서 800만 명 중 200만 명을 죽였는데(Killing Field) 우리라고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재규는 불길함을 감지했다. 비서실장인 김계원을 만나 “차지철이 저러면 안 되는데”라며 걱정했다. 그러니 10·26사건은 직간접적으로 차지철로 인해 생긴 불행한 역사로 판단된다. 이는 비서실장실에서 흘러나와 나의 귀에까지 전달되어 알고 있었다.

“충성은 눈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변질되어 가고 있고, 눈에 나타나면 이미 변질된 것이다”라던 김 사령관의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사령관님, 이러한 획기적인 조치는 반드시 대통령님께 보고하셔야 합니다. 편지에 대한 답변을 하셔야 합니다.”

김 사령관은 그런 나를 보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할 것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고 “좋아, 좋은 생각이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인사과장으로 근무하는 10개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군 내부의 조직·편성과 지휘관들 각자의 특성 중 장점을 배웠고, 지휘통솔법과 지휘관 참모들의 보좌 방법 등 군 지휘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육군 소령 계급에 걸맞지 않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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