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謫客들이 수륙 이천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牧民에는 전혀 뜻이 없고 오로지 국마國馬를 살찌우는 목마牧馬에만 신경썼던 역대 육지 목사牧使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馬政.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 찌든 가난과 심한 우울증밖에는 가르쳐준 것이 없는 고향, 그것은 비상하려는 그의 두 발을 잡아끌어당기는 깊은 함정이었다. 그 섬 사람이 아니고 싶었다. - 현기영, 단편소설「해룡 이야기」(『문예중앙』1979년 가을호).

천형의 땅 그 유배지로 향하는 ‘죄인’들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2박 3일의 자발적 유폐- 땅과 바다의 이천리를 1시간에 이송하는 비행기의 좌석은 한 열에 6개씩 종대였다. 용모 단정한 호송관들은 구명조끼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는 시범을 보이며, 안전벨트를 매고 풀라 지시했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눈치였다. 다만 목사격인 가장이나 인솔자들만 좌우의 ‘말’들을 살필 뿐이었다. 왜 기장들은 꼭 이륙하고 나서야 인사를 하는 걸까? 활주로 그 레인에 잠깐 멈추기 전까지 시간이 많은데 말이다.

제주도島가 언제 제주도道가 되었을까? ‘섬나라’라는 뜻의 탐라국이었는데 왜 한반도의 속국을 자청한 것일까? 아마도 풍부한 해산물을 쌀 같은 오곡과 손쉽게 교역하고자 하는 속사정 때문이었으리라. 짜장 그 ‘천더기’ 땅을 외지인으로서 맨 처음 매입한 이는 누구였고, 어느 도인島人이 팔았을까? 무엇보다 숱한 사람들이 찾고자 애쓰는 노.장자와 공자의 도道를 행정구획 명칭으로 썼을까? 대제불할(《도덕경》제28장)- “위대한 다스림은 분할되지 않는다” 했는데 굳이 경계를 갈라놓고, 그것에 도道라고 이름을 붙인 것일까?

그들은 말고기도 먹는다. 말고기는 굉장히 맛있는 것으로 여기고들 있었다. 소금을 바닷물로 만들 줄 아는데 그 소금은 질이 아주 좋았다. 화란인의 죄수들은 이 소금으로 연어의 소금구이를 해 먹곤 했다. 그들은 이같이 생선을 소금으로 처리하는 요리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닷물은 소금을 만들 목적으로 끓이긴 하나 포르투갈이나 그밖의 지역에서 널리 퍼져있는 염부鹽釜 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었다. 신은 좋은 것이긴 하나 악마하고도 사이좋게 하여 나쁜 일이 생기면 친했던 안면으로 배제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화란인을 부를 때면 ‘남쪽 사람南蠻人’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를 처음 보았을 때 우리가 수중에서도 생활할 수 있을 줄 알았다는 것이다. -『조선국기』(숙종 18년 네덜란드 간행《북동달단지韃靼誌》)

1653년 8월 16일- 네널란드 국적의 포겔 스트루이스호는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끼로 향하고 있었는데 태풍을 만나 제주 서귀포에 표착했다. 총 64명의 선원 중 유명한 하멜을 포함해 36명이 상륙했고, 조선국의 형벌을 받았고, 팔도로 흩어져 살다가 13년 28일 만에 8명이 함께 탈주에 성공해 귀국했다. 당시 하급선원이었던 위트센의『조선국기』는《하멜표류기》와 함께 17세기 유럽에 한국을 인식시킨 최초의 주요문헌이다. 370여 년 전 오롯한 조선의 풍습들- 탐라인들은 남쪽 사람들은 경계했지만 ‘북쪽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게 대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와 훗날의 이중섭(1916-1956) 화가에게 온정을 베풀고 품었주었던 것이다.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 내세에는 우리 부부 처지 바꿔달라 하리. /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 리 밖에 살아남아 / 그대에게 이 슬픔 알게 하리라. - 완당의 한시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

봄 기별은 남녘의 들부터 겨울의 그것은 산과 북쪽에서 내려온다 했던가? 한라산이 설산으로 변한 1842년 11월, 예당선생의 둘째 부인 예안 이씨가 55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충청도 예산 땅의 부고를 제주에 유배된 지 1년의 김정희는 알 길이 없었다. 위리안치- 서귀포 그 대정읍성의 추사는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한지를 적시다가, 바닷바람을 쐬러 집을 나섰을 것이다. 새우젓과 소금 실은 상선과 어선은 여전히 깃발을 펄럭이며 떠 다니고... 찾아 올 사람 없어 부두에 입안하는 객선에서 눈길 거두는데 낯익은 식솔 한 명이 보였다.

수륙 이천리 길을 마음 졸이며 왔노라는 가속은 “삼 주 전에 안방마님의 상례를 잘 마쳤습니다.” 눈물을 쏟으며 고했다. 천축고선생은 소슬한 해풍에 옷깃을 날리며 바닷가의 벼룻길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백천 길 바다도 닿이는 곳 있어 마음의 닻을 풀었던 그 내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어디에 의탁할 것인가. 사실 추사선생은 12살 되던 해 한산 이씨와 초혼례를 올렸었는데 16살에 향년 20세의 조강지처를 잃고 말았다. 비록 55세라고는 하지만 귀양 풀리는 그날까지 살아내 기쁨의 재회하면 좋으련만 모진 세월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세월은 우리의 연륜을 / 묵혀가고 / 철 따라 잎새마다 꿈을 익혔다 / 뿌리건만 / 오직 너와 나와의 / 열매와 더불어 / 종신토록 이렇게 / 마주 서 있노라 – 이중섭 말년의 자작시

1955년 9월 이중섭은 서울 베두루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해 1월부터 나타난 정신이상증세는 성가병원에 1개월 입원해 호전되었지만 다시 발병하고 말았던 것. 이듬해 청양리뇌병원과 적십자병원을 전전하다가 9월 6일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마흔의 나이에 펜과 파렛트를 놓아버린 비운의 대향大鄕- 그에게 제주 바다는 6.25 한국전쟁의 피난처로 고향 원산 바다와 다름없었다.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시절 만난 일본인 부인 이남덕(山本方子)과 1945년에 결혼한 원산시절을 그렇게 잇고 싶었으리라.

맑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 두북두북 쌓이고 / 철철 넘치소서 / 삶은 외롭고 서글픈 것 / 아름답도다 / 두 눈 맑게 뜨고 가슴 환희 헤치자 – 이중섭『소의 말』

한 평짜리 피난민의 방 그 벽에 ‘말’을 써 붙이고 살았던 화가- 서귀포의 이중섭거리와 미술관은 외롭고 서글픈 ‘삶’을 벗어나고자 아니 살아내고자 애쓰는 여행객들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발걸음은 빨랐고, 시선이 내처 달리고들 있었다. 소창다명사아구좌小窓多明使我久坐: 비록 몸은 갇혔지만 정신은 광활하게 자유롭다는 추사의 진묘한 토로. 영물이라는 소는 천천히 걷고, 곱씹어 되새기며, 주시하며 깊게 본다.

제주도 가면 소 같은 두 대인 추사와 대향을 만날 일이다. 하면 두 눈이 맑게 떠지고, 가슴도 환해지리라. 전세로 살다가 비워주는 이승에서 그리 몸과 마음 부리며 살면 지극히 족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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