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추이와 상상력, 선견적 대적관(對敵觀)

대위가 소령 예정자로 간첩을 잡는 대공과장(중령)의 보직을 받았다. 직위보다 2계급 상위직책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과분한 일이라 책임감이 한층 더했다. 간첩을 잡기 위해선 무엇보다 영감과 육감이 있어야 한다. 적을 잡는 대공과장은 꿈을 꿀 정도로 임무에 몰두하고 모두가 간첩으로 보여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놈이 간첩이다’ 싶으면 틀림없는 간첩이었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사는 동안 딱히 설명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는데 내게 있어 간첩을 잡기 위한 추이와 상상력, 관찰력, 치밀성, 영감, 집중, 지식, 체력, 전투 기술과 노력 등이 아니었나 싶다. 운(運)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므로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어린 시절, 시골 교회에서 어린 후배들과 함께 성경을 읽었던 시편 23편 4절 다윗의 시를 기억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탈출한 북한 중앙 통신사 부사장 차관급 이수근, 나는 그가 ‘위장 귀순’한 것을 감지했다. 왜 귀순 했느냐는 질문에 창건 19주년 김일성에 대한 기사를 소홀히 다루어 숙청 대상이 되어 넘어왔다고 했는데 미심쩍었다. 미군이 찍은 화면에 탈출 시 20명의 권총을 뽑은 북 경비병이 소리 지르며 하늘과 땅을 향하여 사격한 것이다. 위장 귀순이란 확신이 들었던 것은 중앙정보부 요원과 함께 강연하러 왔을 때였다. 내가 ‘공산주의의 본질과 7대 비밀 그리고 잔학성에 대하여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가 어물쩍 넘어가려는 답변을 했다.

“그거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얘기하지 맙시다.”

나는 돌아가려는 중앙정보부 안내 요원에게 “저놈, 빨갱이다. 잘 감시해야 되겠어.”라고 당부해 보낸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 이수근은 홍콩을 경유하여 탈출하려다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시) 탄산누트 비행장에서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위장간첩 남파 요원에 대한 중요한 교육과 수칙 중 하나는 간첩으로 인정받아 죽는 한이 있어도 ‘김일성과 당(최고의 존엄)을 폄훼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 이수근 역시 공산당의 지침을 철저히 지켰던 위장간첩이었다. 공산주의를 알고 있는 나의 판단(선견적 추이와 상상력)이 적중했던 것이다. 1967년 3월 22일 위장귀순 3년 전부터 판문점 회담 시 기자 완장을 착용하고 참석한 후 판문점 탈출 시 북괴 경비병들이 위장 사격을 연출하였다.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한 후 전쟁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심리전 및 정보 수집 등 임무를 부여받았다. 파격적인 환영 행사, 정착금 15억 원, 자가용 운전사, 대학 여교수와 결혼 알선 등 간첩 활동 토대 구축을 해주는 등 정부 당국자들의 무능 무지의 대표적인 사례다.

 

간첩 송순영

1968년 9월, 충남 당진 해안에 출현한 무장괴한 송순영을 체포하고 조원 1명을 사살했다. 9월 23일 새벽 5시, 37사단 초소 앞에서 괴한이 출현했다는 신고를 접수받은 나는 부대원 4명과 함께 즉시 출동했다. 작전부대로부터 상황 설명을 들은 후, 무장괴한의 도주로를 봉쇄하고 당일 체포한 송순영을 대동, 현지검증을 통해 조원 성춘경의 사체를 확인 후 사건을 종결했다.

 

무장간첩 임관재, 박일근 사살

1968년 10월 1일 나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대위로서 중령 직책에 있다가 소령 진급을 하다 보니 해프닝도 있었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소령으로부터 중령에 진급한 줄(대공과장 중령 직책)로 착각하고 중령 계급장을 보내온 것이다. 주로 사복 차림으로 근무했던 것이 오해하게 했다.

1968년 11월 1일 오전 7시 20분, 서산군 성연지서에서 거수자(거동 수상자) 출현 신고가 접수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전 8시 30분 현장으로 출동하여 무장간첩이 휴대했던 유기물을 확인한 후 현지 부대 출동은 시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제51사단장 신건선 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치원에 위치한 51사단 병력과 성환에 위치한 제53탄약창 병력, 그리고 예비군으로 온양-당진 간 도로를 차단하고 전투부대 1개 대대를 투입, 당진-서산 간 도로 일대를 수색할 것’을 건의, 원점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형성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했다.

11월 2일, 전단 8,000장을 제작, L-19 항공기를 이용해 살포하고 자수를 권고하면서 수색작전을 수행했다. 다음 날인 11월 3일 오전 8시 30분, 가야산 기슭으로 괴한 2명이 도주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나는 지프차에 남상일 대위와 김태용 상병을 이끌고 간첩들이 도주하고 있는 계곡과 능선을 따라 공비들이 숨은 능선에 은밀히 접근했다.

210고지로부터 동남방 9km 지점인 가야산(677m) 방향으로 도주를 예상하고 차단, 고착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지원 병력이 없어 사살하기로 결심, 210고지를 공격했다. 가야산으로 도주할 경우 작전이 장기화될 것으로 판단했다. 같은 기간인 1968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동해안 울진 삼척 지역에 130명을 침투시켰으며 서해안은 기만을 위한 경험이 많은 무장요원을 침투시킨 것으로 판단하였다.

안전한 장소를 점령한 홍성 분견대장 소병민 소령은 전인철 상사, 전용주 하사와 함께 무장간첩이 위치한 호로부터 150m 떨어진 정상에서 적을 감시 차단했다. 그의 우측에 있던 전인철 상사가 갑자기 “대장님 위험합니다. 엎드리시죠.”라고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탕! 탕!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무장간첩이 쏜 흉탄에 소 소령이 후두부 관통상을 입고 전사했다. 소 소령이 전사했다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즉시 소 소령을 긴급 후송할 것을 큰 소리로 지시한 후 적이 있는 고지 정상으로 전진했다.

210고지 정상 150m 전방에 이르렀을 무렵 무장간첩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나는 이에 즉각 칼빈 소총으로 응사하면서 적이 위치한 고지 우측 은폐된 작은 길을 따라 정상 30m까지 접근했다. 그때 예기치 못한 무장간첩의 기습적인 권총 사격을 받았다. 선두에 섰던 나는 반사적으로 5m 후퇴, 아래 움푹 팬 곳에 몸을 던져 엄폐했다.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안정하기 위해 성경 시편 23편 4절을 암기하고자 했으나 급한 상황에서 성경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안했다. 그 순간 내가 신앙심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신앙심이 약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든 나를 향해 죽음의 비운이 비껴갈 거란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절체절명의 많은 순간에서도 살아나온 내가 아니었던가. 3번의 대북 응징보복작전 때도, 1·21청와대(김신조) 침투사건 작전 때도. 아니나 다를까, 운전병의 철모 중앙으로 권총 실탄이 날아와 그중 1발이 이마에 명중했으나 관통하지 않고 튕겨나갔다. 나는 철모를 쓰지 않았지만 총을 맞지 않았다. 10m 밀려났으나, 은폐된 지점에서 5분간 대기하였는바 그들은 우리가 철수한 줄 믿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다시 고지정상 20m까지 육박, 운전병이 사격하는 동안 나는 20m 우회하여 그들 후방에서 수류탄 2발을 투척하여 210정상 호를 명중시켰다. 무장간첩은 우리 향토예비군이 지역 방어로 파놓은 호 속에서 서로 탈출 못 하도록 발을 묶어 놓고 죽어 있었다. 개인호 주위로는 수류탄 8발을 가지런히 깔아두고 CAR 소총과 권총으로 결사적인 대항을 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아찔했다. 그때 만약 20m 밑의 우리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던 적이 수류탄 1발만 던졌어도 우리 모두는 죽었을 것이다. 하늘이 돕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말 그대로 구사일생이었다. 적은 우리가 사살되었거나, 소 소령 전사 후 철수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5분간 적막이 흘렀기 때문이다. 만약 작전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면 나의 생명은 붙어 있지 못했을 것이다. 유리한 고지에 위치한 철저히 훈련받은 공비들이 자기들을 잡으러 온 남한의 군인들을 관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 작전 이후 실제로 북한은 대남침투 전술 방향을 수정하였고, 대규모 무장간첩 침투를 자제했다. 김일성은 중앙당 연락국인 대남사업 국장 허봉학을 경질시키고 김중권을 재기용하면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대남사업담당 비서로 격상시켜 인민 무력부의 정찰국 임무와 대남공작 사업을 총괄하게 하였다. 현재는 정찰총국이다. 이때 사살된 임관재와 박일근은 북한 노동당 연락부 소속으로, 특히 임관재는 충남 서산초등학교 5학년 중퇴 후 대서소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운동을 즐겨하는 만능 운동선수였다. 씨름을 잘했고 변장술에도 능했다. 청년이 되어선 일본군에 입대, 남양군도에서 복무하다가 8·15광복과 함께 귀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남로당 박헌영 직계로 서산경찰서를 습격한 주모자로 악질적인 좌익 활동을 해왔다. 1948년 10월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무술 경관 20명이 잠복 급습해 체포할 만큼 힘이 세고 체격이 매우 건장했다. 6·25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탈옥하여 공산치하의 서대문 내무서장과 경인지구 인민군 군사후원회 위원장을 하다가 월북,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남파교육을 받고 박일근과 함께 무장간첩이 되어 서산 해안으로 침투했다.

이때 전사한 소병민 소령은 1968년 11월 3일자로 중령으로 추서되었고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소 소령은 6·25전쟁 때 소위 신분으로 참전했던 전투 경험이 많은 군인이었다. 그의 부인이 찾아와 시신을 부둥켜안고 우는데 나 또한 덩달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괴로웠다. 차라리 내가 저 운구차에 타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 선배인 소 소령 희생은 직책상 상위직위였던 나로서는 책임이 있다. 애초 작전에 들어가면서 나는 대공과장으로서 소 소령과 두 하사관에게 안전한 지역에서 적을 고착견제 하도록 지시했었다. 위험한 지점으로 공격한 우리보다 생명의 위협은 없었는데 전사하여 더욱 안타까웠다. 육군본부 군사 연구실에서는 이날의 작전을 교육 자료로 만들어 국군장병들에게 교육했다. 현지 주민의 거수자 출현신고를 접수하고 이를 예리하게 분석 판단하여 필사즉생 정신으로 도주하는 적을 지근거리까지 따라붙어 완전 섬멸한 집념, 결사 정신, 그리고 전투기술을 장병들에게 정신교육 자료로 배포했다.

당시 나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지 한 달하고 사흘이 지났다. 만약 작전 중 내가 사망했다면 중령으로 추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33일 만에 대위에서 중령으로 2계급 진급하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록(기네스북)의 역사를 남겼을 것”이라며 해서는 안 될 농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간첩 김재홍, 한인동 일당 검거

1969년 3월, 남파 간첩 김재홍과 고정 간첩 김강렬 등 일당 7명을 검거했다. 당시 나는 6·25전쟁 때 행방불명된 간첩용의자 김재홍이 서울에 거주 중이라는 첩보를 접수, 1969년 3월 7일에 김재홍의 삼촌 김강렬과 그의 처 이옥수, 장녀 김혜숙 등 3명을 임의 동행하여 철야 신문한 결과, 김재홍이 서울에서 김현각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이라는 진술을 확보했다. 김재홍과 김강렬은 각각 징역 15년과 7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같은 해 3월에는 생포 간첩 송순영을 신문하여 3차례에 걸쳐 남파 활동 중이었던 한인동과 그에게 포섭된 일당 9명을 검거했다. 송순영으로부터 한인동과 무인포스트를 설정하여 접선하기로 되어 있다는 자백을 받고, 한인동과 그의 일당 검거에 나서 모두 검거했다. 이후 한인동 등은 전향하여 우리의 역용접선공작에 적극 협조했다. 1970년 5월 3일에는 충남 서산군 안면면 승언리 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간첩 3명을 역용공작으로 유인, 사살했다.

 

고정간첩 이춘택 검거

모기관이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 종결한 사건을 재수사하여 1969년 4월 19일, 간첩 이춘택 일당을 검거했다. 이춘택은 1965년 11월 12일, 서천군 지하당 구축 임무를 띠고 남파되어 3회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하고 주민 포섭을 기도했다. 1969년 4월 3일에는 6·25 당시에 의용군에 입대하여 월북한 후 남파되어 활동 중이었다. 4월 15일, 이춘택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증거를 확보하여 2주간 미행한 끝에 재수사 후 이춘택, 김용점(母), 이춘만(弟) 등을 검거하였다. 이 사건은 507대공과장에서 8사단 보안부대장으로 발령되기 이틀 전에 보고를 받고, 8사단 보안부대장으로 부임 후 종결한 사건이다. 한 사건을 두 개의 보직에 걸쳐 종결한 특이한 사건이었다.

북한은 호시탐탐 악랄한 수단으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해 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그 모든 것을 중앙당 연락국에서 담당했던 것을 현재는 정찰총국에서 수십 년째 담당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무력적화통일의 당헌 당규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세습체제 유지에 대한 노선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체제를 신봉하고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서, 국가체계를 문란하게 하고 위기상황이 오면 내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반공법, 보안법도 처리 못 하는 국회의 안보 불감증. 우리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국가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어느 누구도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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