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 1·21사태의 재구성 Ⅰ

 

응징보복작전 때문에?

“아니, 그때 장군님께서 대위 시절 세 번씩이나 북한에 넘어가 응징보복작전을 했기 때문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거 아니었습니까?”

2014년 3월, 내가 출연했던 종편의 한 앵커가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세 번의 대북 응징보복작전에 나선 때가 1967년 9월과 10월이었고,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것이 3개월 후인 1968년 1월 21일이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북괴의 1·21 청와대습격은 물론 이틀 후인 1월 23일에 정찰활동을 하던 미 프로블레호를 원산 앞바다에서 납치한 사건은 적어도 6개월에서 1년 이상 준비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연관성이 없는 도발로 생각한다.”

당시 우리 군과 미군은 베트남전에 참가하고 있던 터라 어떠한 도발에도 강력한 응징이 없을 것으로 적은 판단했을 것이다.

 

김신조와의 첫 대면

내가 김신조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1968년 1월 22일 새벽 4시경이다. 그가 세검정 계곡(상명여대 문화촌 입구)에서 새벽 3시 자수한 후 새벽 4시 15분에 내게 인도되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넘어왔던 일당들을 잡기 위한 ‘도주로 차단작전’에 들어가면서였다. 나는 김신조를 대동하여 비봉 승가사 옆 200m 지점의 드보크(간첩장비 침투장비 비밀 매설지)를 찾아 침투 장비를 회수, 공비 29명을 사살하고, 1명이 월북함으로써 1968년 2월 4일 작전을 종결하였다.

2주 만에 작전을 종결할 수 있었던 것은 김신조의 협조 덕분이었다. 나는 김신조를 설득 회유하여 31명이 “박정희 목 따러 왔다”는 진술과 함께 편성장비, 훈련, 습격, 철수 계획까지 진술을 받아냈다. 이에 작전부대에 침투로와 철수로 등 현장 상황을 전파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김신조 증언

1968년 1월 21일 오후 8시, 연일 살을 에는 듯한 영하 20도의 추운 겨울 날씨에 길 양편 종대로 줄지어 가던 31명의 일행 중 하나가 경찰서장을 향해 총알을 뿌렸다.

“나, 모르겠나? 나, 종로경찰서장이다!”

일행의 앞길을 막아선 사람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교전이 시작됐다. 종로경찰서장에게 총격을 가했던 조장 김종웅은 “청와대를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쳤고, 그의 외침과 함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김신조를 포함한 일당들은 수류탄을 까서 던지고 총을 난사했다. 삽시간에 서울 한복판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에 그들은 76명의 공작원으로 구성되었다가, 민족보위성 정찰국장인 김정태의 지시로 31명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공격 목표도 청와대로 축소 조정되었다. 원래는 5개 목표로 편성하여 1목표 청와대, 2목표 미 대사관, 3목표 육군본부, 4목표 서울교도소, 5목표 서빙고의 간첩수용소를 각각 습격할 것을 준비했으나 4개 목표는 취소됐다. 1목표 청와대 습격으로 31명을 재편성, 강도 높은 훈련을 한 후 1조는 청와대 정문, 2조는 청와대 본청사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을 각각 공격하고 청와대 차량을 탈취하여 시동을 걸고 출발을 엄호하도록 하는 등 유사 건물과 지형훈련을 수십 차례 했다고 한다.

1월 16일 저녁 10시 영하 25도의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일당들은 황해북도 연산군 124부대를 출발, 1월 17일 새벽 5시에 개성 시내의 남동쪽에 외떨어진 남파공작원 초대소를 거쳐 남으로 향했다. 개성 초대소는 일본 경찰서 낡은 건물이다.

일당들이 택한 코스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2사단의 경계지역으로 경계취약 지점을 택했다.

1월 18일 새벽 2시쯤, 휴전선의 철조망이 미군이 주둔한 지역에만 설치되고,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에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한 그들은 철조망을 자르고 그 밑을 엎드려 빠져나왔다. 당시 철조망은 철기둥의 바깥쪽 그러니까 북쪽으로 쳐져 있었다. 철기둥을 잡고 넘어오지 못하도록 그물을 철기둥 밖으로 쳐놓았는데 이러한 철조망 구조가 오히려 철기둥을 은폐물 삼아 절단된 철조망을 통과하기 쉽게 했다. 그들의 침투로는 개성에서 출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이 있는 문산의 고랑포를 거쳐, 미2사단과 우리군 25사단의 경계 지역을 통과, 석포로 건너와 파평산에 이르렀다. 파평산을 넘어 노고산을 거쳐 앵무봉을 지나, 서울의 구기터널 위쪽인 북한산의 비봉을 넘어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에 이르도록 계획돼 있었다. 일당들은 그때 26사단 마크를 단 군복을 착용했다.

1월 19일 새벽 5시쯤, 일당 31명은 법원리 초리골 뒷산인 삼봉산에 도착. 오전 10시쯤에 나무꾼 우씨 형제와 마주쳤다. 일당들 대부분은 우씨 형제를 죽이자고 했다. 하지만 김신조는 형제의 초라한 행색을 불쌍히 여기고 살려줄 것을 주장했다. 땅이 얼어서 묻을 수 없다는 것을 핑계로 댔다. 더욱이 나무꾼 이었다. 어떻게 처치했으면 좋겠는가, 상부의 결정을 바란다는 내용을 북으로 무전을 쳤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암호문이 있었으나 첫 번째 숫자를 풀지 못했다. 숫자를 풀어 암호문을 맞춰 보면 지시 내용이 확인되는데 해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일당들은 남쪽에서 작전을 하는 나흘 동안 한 번도 무전 연락을 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우리 수사기관에서 무전을 풀어보니 ‘원대복귀’라는 암호 내용이었다. 만약 그때 일당들이 암호문을 제대로 해독했다면 우리의 대공비 작전부대 무전통화 내용을 감청, 습격실패를 예견하고 철수지시를 하여 1·21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를 작전부대에 참고로 알려주었다. 어쨌든 일당들은 우씨 형제를 회유, 입당원서를 받고 신고하지 않을 것을 다짐받은 후 놓아주고 무릎 위까지 푹푹 빠지는 어두운 눈길을 헤치며 다시 강행군을 했다. 보광사 앞길을 따라서 미군 기지가 있는 앵무봉을 왼편에 두고 송추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송추 골짜기에 이르러서야 비상이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구파발발 의정부행 버스 종점의 길을 군인들이 차단했고, 경찰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북한산을 에워싸고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일당들은 등을 보이고 있던 경찰을 뒤로 하고 서울의 방어망을 뚫고 자하문 고개로 접어들었다.

1월 21일 새벽 5시, 비봉 북방 기슭에 다다랐다. 하지만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북악산을 향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북악산에 있어야 할 시간에 세검정과 구기동이 내려다보이는 비봉 남쪽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1월 21일은 일요일로 대통령이 관저에 있는 날로 판단, 일당들로선 기습을 늦추거나 변경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인 1월 22일은 월요일로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이라 사람들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더구나 이미 비상이 걸려 있어 그들로 선 일분일초라도 빨리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해야만 했다. 하늘엔 헬리콥터가 날아다녔고 군인들이 산을 수색했다. 법원리 나무꾼 형제가 신고한 것이다. 여전히 본부와의 무선 교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서 군복을 벗고 준비해온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벗은 옷과 배낭은 모두 땅속이나 바위 밑에 묻었고 각자 기관단총 1정, 권총 1정, 탄환 350발, 수류탄 8개, 반탱크 수류탄 2개, 그리고 단도 하나씩을 차고 그 위에 바바리코트를 입었다.

1월 21일 오후 8시, 일당들은 세검정 도로로 들어섰다. 영하 20도의 추운 날씨를 헤치고 세검정 버스 종점에 도착, 빈 버스가 세 대 나란히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타고 청와대까지 갈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총조장 김종웅은 “계획 변경은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며 계획대로 대열을 편성하여 길을 따라 걸어서 청와대 정문까지 가도록 했다. 원래의 계획은 1월 21일 저녁 10시 30분까지 청와대를 습격, 청와대 차량을 이용하여 북으로 전속력 질주해 ‘자유의 다리’나 남파했던 루트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명령대로 일당들은 길 양편에 종대로 갈라서서 청와대를 향해 줄지어 갔다. 상명여대 입구의 세검정 사거리를 지나 자하문 고개에 이르렀을 때, 종로경찰서 소속 순경 둘이 검문을 했다. “누구냐?”고 묻는 순경의 말에 김종웅은 “CIC(방첩대)”라고 대꾸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순경 2명이 일당들의 맨 뒤에 있던 정치부 조장을 공격했다. 일당들이 경복고등학교 후문 근처에 이를 무렵, 종로경찰서장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다시 나타난 순경 둘은 일당들의 앞을 가로막았다가 애먼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상한 청년 30여 명이 청와대를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경찰서장 단독으로 길을 가로막고 나설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비상이 걸린 그 지역으로 버스가 들어올 수 있었는지.”

작전 중 김신조가 내게 말했다.

김신조와 일당들 중 몇몇은 자하문 고개가 노출된 것을 알고 경복고등학교 후문으로 들어섰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총소리를 듣고 놀란 일당 중 한 명이 밖에 나와 있던 수위를 향해 총을 쐈다. 다른 일당들은 경복고등학교 마당으로 들어오기도 했고, 오던 길로 퇴각하거나 북악산 쪽으로 숨기도 했다. 서울 시내는 이미 청와대 경내와 외곽 경비를 수경사 예하 30대대가 맡고 있었고 대대장은 전두환 중령이었다. 김신조는 다른 일당 2명과 함께 모든 무기를 버린 채 여차하면 자폭하기 위한 수류탄 하나만을 집어 들고 인왕산 줄기를 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좁은 길이 나타났는데 앞서던 일당 하나가 총을 맞고 피를 뿌리며 고꾸라졌다. 이어서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다른 일당 1명이 자폭했다. 김신조 역시 사방에 깔린 군인들에 의해 포위가 됐으나 다급함에 어느 집 지붕 위로 도망쳤다. 하지만 어두운 밤에 지붕을 타다가 지붕이 푹 꺼지는 바람에 부부가 자는 안방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도둑이야!”를 외치는 주인 부부의 외침을 뒤로 하고 도망을 쳐 상명여대 입구와 문화촌 입구의 세검정 계곡까지 뛰었다. 바위 뒤로 숨어들었으나 이내 군인들에 의해 포위당했다.

“나오면 살려 준다. 손들고 나와라.”

자수를 권고하는 군인들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김신조는 반응이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김신조가 두 손을 치켜들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뗐다. 손에는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여차하면 너 죽고 나 죽을 표정이었으나 눈빛은 복잡했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있는 몰골에서 그가 더는 악명 높은 북한군 특수부대원이길 포기한 것이 역력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차라리 사는 게 낫겠다 싶었던지 인간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땅에 내려 놔!”

군의 외침에 그는 자수를 하기 위해 손에 들려 있던 수류탄을 천천히 내려놨다. 이를 놓칠세라 군이 치고 들어가 그의 몸을 돌려 두 손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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