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누명

내가 베트남전에 참가하기 위해 강원도 홍천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날 새벽 1965년 9월 8일 0시 40분,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현 무용전문지 《춤》 발행인)이 납치돼 매를 맞은 사건이 발생했다. 괴한 4명이 “시경에서 왔다.”며 조 과장을 장위동 자택에서 납치해서 뭇매를 때려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 그러자 각종 언론매체는 바로 직전인 1965년 9월 7일 오후,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 직무 대리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집 대문이 폭발물에 의해 안벽이 허물어졌던 사건까지 싸잡아 군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동아일보는 걸핏하면 벌어지는 취재기자와 간부에 대한 연행과 조사가 이뤄지자 정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경찰은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지만 사건이 해결되지 못했다. 언론인 테러는 정치 문제화되어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영구 미제 사건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항간에는 못 잡는 것이 아니라 안 잡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신문은 한동안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 테러사건의 범인을 마산 방첩부대장 정명환 대령으로 몰아갔다. 이유는 사건 직전, 정명환 대령이 기자들과 군 기사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혐의가 없자 어느 순간, 장위동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장위동에 살고 있는 논산훈련소의 유기홍 중령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거기서도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홍릉의 625방첩대장이었던 나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나와 무관한 사건임이 밝혀졌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신문은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내가 더 의심을 받았던 것은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때맞춰 베트남 전선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베트남으로 도망갔다며 신문은 루머를 더욱 부풀렸다. 당시 나와 함께 방첩부대에서 출국했던 우재록, 김명규 두 하사를 하수인으로 지목까지 했다. 신문 기사의 펜대는 제멋대로 춤을 췄다.

“이 대위는 당일 저녁, 홍천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성립, 범인이 아니다.”라는 어느 신문의 정확한 기사가 있었음에도 막무가내였다. 우재록과 김명규는 본국 소환 명령을 받아 다녀왔고, 내 아내는 국회 상임위원회에 불려가 알리바이를 증명하기까지 했다.

그에 앞서, 나는 당시 수사본부장을 맡았던 김봉환(현 변호사) 검사장을 찾아가 따지듯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자꾸 신문 방송에 오르지요?”

9월 13일, 언론이 연일 시끄럽게 떠들자 윤필용 장군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 대위, 해명해.”

나는 그 길로 선글라스에 권총을 차고 필동의 수사본부로 향했다. 내가 도착하자 수사본부 요원들은 몹시 당황했다. 혐의가 있고 잘못이 있었다면 당연히 내게 먼저 연락하고 출두해 조사받도록 했어야 하는데 당시의 나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않았다. 내가 먼저 연락도 없이 불쑥 수사본부로 들어섰다. 나는 차고 있던 권총의 ‘리볼버’를 꺼내 실탄을 빼고 수사본부장 앞 책상에 던지며 “내가 언제 테러했습니까?”라고 묻자 수사요원들은 겁을 먹고 당황해 안절부절못했다. “우리도 신문 봤습니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라고 대꾸했다.

“내가 꼭 선의의 보복을 하겠다!”

나는 움찔하는 그에게 한마디 던졌다. 선의의 보복은 반드시 군에서 성공하여 보여주겠다는 각오의 의미였다. 나중 우리 부대원이었던 하사관 우재록과 김명규가 베트남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소환되었다. 두 사람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수많은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두 사람은 떳떳하게 거기 모인 기자들을 바짝 약오르게 했다. 나는 그 둘에게 당당하고 떳떳한 군인 모습을 보여주라고 지시하였다.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진실을 모른다. 하지만 오해를 받고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있다. 내가 범인이 아니란 사실을.

이후 난 마음을 단단히 옥죄었다. 혹시라도 나로 인해 그 어떤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정의롭고 의로운 군인이 되리라고. 하지만 당시는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때의 해프닝이 내 일생일대에 얼마나 큰 치명적 타격을 가해올지에 대하여…….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국가에 충성한 나에게 고작 테러리즘의 의혹이라니. 정치인과 언론인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수사본부장 김봉환 검사(현 변호사)는 분명 나에게 말했다. 이 대위를 조사할 내용이나 증거가 없습니다. 분명했다. 야당과 언론 덕분에 이 대위는 장군이 아닌 스타(별)가 되어 유명한 선글라스, 쌍권총 이 대위로 월남 그리고 귀국 후 공비와 간첩작전에 필사즉생 무공의 사나이가 되어 소령 그리고 3년 만에 중령으로 특진 칠전팔기 대령 장군 그리고 단독 소장으로 승진, 사단장 참모총장까지 했다. 야당과 언론이 나를 성공시켰다. 바로 이것이 선의의 보복이다. 말이 씨가 되었다.

 

맹호 작전 영화

1965년 11월 중순 당시 유명한 액션스타인 장동휘, 황해, 장혁 그리고 남미리, 이영자 등 영화배우 8명과 작가, 촬영기사 등 16명이 군수지원사령부로 왔다는 통보가 방첩부대에 전달되었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 방첩부대장 이상렬 중령에게 문의했으나 모르고 있었다. 맹호사단 정훈참모조차 모르고 있었다. 군수지원사령관에게 보고하고 통신근무대장 한양우에게 천막, 샤워장, 화장실 등을 준비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파월 후 민간인을 처음 만났고, 업무상 우리 방첩부대 소관이었다. 영화에서만 보았지 실제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 배우들에게 부대 장병들은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틀 후 배우, 작가 그리고 촬영기사 대표들이 나를 찾아왔다. 특히 황해와 장혁은, 한국에서 내가 알고 지내던 이대엽 등을 거론하며 무조건 이진삼을 찾아가면 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1965년 우리 한국은 정말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육군대위의 파월 전투수당은 월 115불이었는데 쓰지 말고 모두 한국으로 송금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5,000불이면 화곡동과 답십리 일대에서 작은 방 3칸 정도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을 살 수 있었다. 흑백 TV, 냉장고, 전화를 팔면 셋방살이 청산하고 집을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부끄럽지만 당시 초등학교 가정 형편 파악을 위한 조사에 전화기 보유 여부가 주요 항목이었던 사실을 우리 손자 세대들은 믿을까 의문이다. 나는 군수지원사령관에게 할 수 있는 사업이 있음을 보고했다.

“맹호작전 촬영차 감독과 배우들이 준비도 없이 와서 대책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정훈장교, 기동장비 확보와 경호 경비 요원 등 필요한 것은 제가 협조하여 준비하겠습니다. 장가오는 놈이 중요한 것을 빼놓고 왔다는 농담이 있듯이 필름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실제 작전 장면을 찍는 기록영화와 시나리오대로 찍는 촬영용 그리고 예비 필름, 합해서 필름 3개 세트면 해결됩니다.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상 외국 파병이기 때문에 온 국민이 관심과 기대를 갖는 역사 자료가 될 것이며, 이는 군 사업의 범위를 넘어 국가 차원의 사업입니다. 좋은 기회입니다. 투자 대비 효과가 큰 사업 한번 해보시지요. 채명신 사령관께 보고하셔서 맹호사단 통신참모 이석호 중령을 촬영기사, 작가와 함께 홍콩으로 출장을 보내 필름을 구매하게 하여 빠른 시일 내에 촬영을 마치게 되면 6개월 내에 국민들과 세계만방에 한국군의 위상을 크게 드높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범준 장군은 “알았다. 이 대위, 이런 착상이 어디에서 나와?” 하면서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훌륭한 작품이 완성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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