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신원 조사

월남에서의 보직은 맹호사단 기동대장 겸 100군수사령부 보안부대장으로 소령 직책이었다. 국내에서의 특공대장 경력을 고려하여 한국과 우방국의 VIP에 대한 경호 임무인 기동대장 직책과 월맹군과 베트콩 등, 적의 정보를 수집하여 맹호사단에 제공하는 위험하고 어려운 직책이었다. 짧은 기간에 임무를 분석하고 대원들의 특기를 고려하여 3개 팀을 구성하였으며, 3개월 후부터는 맹호부대 정보참모부는 전투 정보를 수집하고, 보안부대는 민관군 특수 정보를 수집하기로 협조하였다.

맹호사단은 홍천에서, 100군수사령부는 용평에서 각각 파월을 준비하고 있었다. 방첩부대 요원으로 군수사령부로 부임하는 날 참모장 장근 대령이 내게 하소연했다. 출국 일주일 앞두고 보안사령부로부터 중령과 소령 중 9명이 신원 부적격자로 통보받았다는 것이다. 사령관인 이범준 준장이 육사 8기 동기생인 방첩부대장(현 기무사령관) 윤필용 준장을 찾아가 9명의 장교에 대한 재심을 부탁했다. 윤 장군은 만약 월맹군이나 베트콩에게 포로가 되면 북한으로 보내질 것을 우려하면서 책임 못 진다는 답변을 하였다. 언제 다시 선발하여 신원조사를 하느냐로 사령부가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방첩부대의 신원 조사 결과는 내용(부적격 사유)은 없고 명단만 통보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명단을 가지고 아침 07시에 서울 방첩부대본부로 향했다.

사령부 보안처장 P대령을 만나 애로사항과 문제점을 이해시키고 9명의 명단을 놓고 보안과장 H중령을 불러 문을 잠그고 존안 자료를 검토하여 소령 2명을 제외하고 중령 4명, 소령 3명 총 7명을 구제하고 귀대하여 이 사령관에게 보고하였다. 사령관은 악수를 청하며 수고했다면서 참모장을 불러 신속 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방첩부대 본부 처장과 과장은 군수지원사령관과 방첩부대장 간에 있었던 내용을 모르고 도와주었는데 방첩부대장이 알면 줄초상이 납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다 지겠습니다.” 하면서 조용히 처리할 것을 건의하였다.

1년 후 나는 방첩부대장과의 약속대로 귀국하여 특공부대장 보직을 다시 받았다. 1966년 9월 서울 방첩대장 김진구 대령 초청으로 노태우, 권익현, 윤필용 등 5명이 시청 앞 남강 일식집에서 나를 위한 귀국 식사 모임을 가졌다. 나는 1년 전 부대장 보고 없이 처리한 파월 장교 7명의 신원 조회 문제를 설명하면서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윤필용 사령관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큰 소리로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라고 하자 모두들 박장대소하였다.

“나만 병신됐네. 이진삼, 잘 했어! 그때 알았어도 내가 어찌 했겠나. 자, 술 한 잔 하자!”

 

베트남전의 참전

출국을 며칠 앞둔 갑작스러운 베트남 전선행은 부모님은 물론 처자식에게조차 말할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가족 모두가 충격 받을 것이 염려되어 베트남에 도착한 후 편지를 하기로 결심했다. 며칠간 강원도로 대간첩 작전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군복에 권총을 차고 홍릉의 부대로 갔다. 혹시 내 마음이 변할까 봐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상렬 중령과 함께 그의 지프차에 동승, 홍천으로 향했다. 이 중령은 나에게 소령 직책인 군수지원사령부 방첩대장과 맹호사단 기동대장 겸무보직을 권하였다.

1965년 10월 12일, 나를 비롯한 맹호부대원들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출병식을 갖고 14일, 인천항에서 미국 대형 여객선으로 부산항을 거쳐 22일에 베트남 퀴논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10월 15일 부산에 도착하고 보니 걱정이 앞섰다.

아내는 청량리 홍릉 특공대장실을 방문했다.

“애기 아빠 어디 있어요? 만나게 해주세요.”

아내는 보좌관을 만나 내 거취를 물었고, 이에 상황을 판단한 보좌관은 방첩부대본부 인사과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내가 ‘어제, 인천을 출발해 부산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사령부는 아내에게 야간열차를 이용하여 다음 날 새벽 부산역에 도착하도록 배려해주었고, 부산 방첩부대에서는 내게 연락해 부산 방첩부대장실에서 아내와 만나게 되었다. 내가 부산 방첩대장실로 들어서자 네 살 된 아들이 아내의 치맛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 아내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삼키느라 아내의 어깨는 심하게 흔들렸고, 이를 본 아들이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내를 향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와 아이를 안고 토닥거리는 것밖엔. 얼마쯤 지났을까, 아내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아내는 내가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듯 딱 한 마디만 던졌다.

“운한 아빠, 임무 잘 마치고 돌아오세요.”

아내의 그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한민국 이진삼 대위의 아내다운 말이었다. 아들은 올 때처럼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걸어가다 뒤돌아서서 한 번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아들과 아내의 모습이 사라질 즈음에서야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마저도 한숨에 묻혀 소리로 만들어내진 못했다.

아내는 내가 베트남 전선으로 가는 것을 육사 교수로 있던 동기생 김상구(후에 전두환 동서가 됨) 대위를 통해 들었다고 했다. 나를 찾아 우리 집에 들러 “운한 아빠, 월남 간다면서요? 아무 말 없었습니까?”라고 묻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 방첩부대의 일이란 게 밤낮이 없고, 작전 중에는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 부지기수인 까닭에 아내는 내가 대간첩작전 중인 줄 알고 있었다. 베트남 전선행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로 착잡했을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원래는 아내가 알기 전, 부산에 도착하는 즉시 부산 방첩부대 대공과장에게 부탁하여 나의 심정과 사정을 아내에게 전해주도록 할 생각이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내 생각만 했다는 죄책감에 눈물이 났다. 10월 16일 부산항 환송식이 끝나고 해지는 황혼 속에 파도를 가르며 뱃고동 울리면서 월남을 향하여 떠났다.

 

맹호부대

맹호사단 지역은 중부 항구 도시인 퀴논을 비롯하여 약 1,400km²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 전술책임 지역이었다. 전술책임 지역 내의 고보이 평야는 쌀 생산지로 유명한 곳으로 곳곳에 베트콩들의 전략촌이 널려 있었다.

베트남 전선에서의 내 직책은 군수지원사령부 방첩대장 겸 베트남을 방문하는 VIP의 안전을 담당, 경호하는 기동대장이었다. 또한 기동대장으로서 한국을 포함하여 미 고위 장성들과 상·하의원, 장관을 비롯해 우방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을 경호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나 국제사회에서 미군의 베트남전 개입을 명분 없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소리가 높았다. 그럴수록 많은 지도자들과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나의 역할은 막중했다. 베트콩이 있는 지역에서의 경호는 언제 어느 때 나타날지 모르는 적과의 조우를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은 대규모의 전투 손실보다 비전투 손실이 훨씬 많았던 전쟁이다. 환경도 한 요인이었다. 춘하추동을 구분할 수 없이 이어지는 후텁지근한 날씨에 대한 병사들의 적응 미숙과 언제 어디서 기습해올지 모를 위험으로 긴장과 불안이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작전지역까지도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다니며 정보 수집을 했던 터라 위험이 배가되었다. 모든 군사작전은 사전 충분한 정보 수집과 치밀한 계획과 정찰 등으로 만전을 기한 후 실시해야 했으므로 내 역할은 막중했다.

그 무렵 퀴논항에는 700여 명의 한진 운수 근로자들이 용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퀴논항에 도착한 군수 물자를 하역, 운반하는 용역을 맡아 각 부대의 탄약고까지 운반했다. 특히 퀴논 근교의 롱탄 탄약고에서 19번 도로를 따라 플레이쿠까지 탄약 수송하는 일은 위험천만했다. 언제 어디서 베트콩의 사격을 받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매일 수백 대씩을 수송했다. 이때 획득한 외화는 한진을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세웠고, 한국의 경제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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