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리더십

중대장을 할 당시는 5·16혁명이 일어난 후 1년이 지난 때로 몹시 어려운 시기였다. 쌀과 보리(압맥)를 4 대 6으로 혼식했다. 그런데 상부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종전 4 대 6으로 혼식하던 것을 3 대 7로 하고 남는 쌀의 양이 얼마인지를 명시한 후 반납하도록 했다. 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60만 명의 장병이 보리를 더 먹고 쌀을 절약하자’고 했다. 상부 지시가 내려와 각 부대별로 실행에 들어갔다.

며칠 후 점심시간, 대대장이 우리 중대 식당을 방문했다. 대대장은 병사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자네들, 보리가 더 들어가니까 밥맛이 좋지 않나?”

그 말에 병사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동의하지 않았다. 보리가 얼마나 입안에서 껄끄러운지는 질문하는 대대장이 더 잘 알 터. 그러면서도 대대장은 다시 물어왔다.

“밥맛, 좋지 않나?”

그제야 병사들은 마지못해 “네”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이를 지켜보던 나는 안 되겠다 싶었다. 대대장이 떠난 후 중대원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중대원 여러분, 지금 대대장님은 혼식 비율이 3 대 7인 게 미안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다. 보리밥 먹기에 얼마나 괴롭겠나.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쌀을 절약하여 국가경제에 이바지하게 되는 점을 명심하자. 한 번 씹을 것을 두 번 씹고, 두 번 씹을 것을 세 번 씹어 먹으며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자. 미래의 찬란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에 우리 중대원들이 솔선수범하자”

그러자 중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네, 알겠습니다.” 하며 큰 소리로 답했다. 나의 지휘 통솔 방법은 대대장과 달랐다.

“패장은 병법을 논하지 못한다(敗軍將兵不語)”는 말이 있다. 이 말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스미스부대를 비롯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즉각 투입, 한반도 적화를 막아낸 딘 장군(1899. 8. 1.~ 1981. 8. 24.)이 공산국가에 대하여 경계해야 할 이유를 한신(韓信)의 고사를 이용해 한 말이다. 3년간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석방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지독한 굶주림과 회유에 시달리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배반하지 않은 군인정신이 투철한 장군이었다.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다른 부하 사랑으로 위기에 처한 부하를 살리다 생긴 일이었다. 투철한 군인정신과 인간미 넘치는 장군이었다. 포로가 되어 격리 수용되었을 때도 부하 병사들과 함께 지낼 것을 요구, 장군의 위신과 미군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상관이자 지휘관으로서의 명예와 군인수칙에 충실했던 리더십이 돋보인 장군이었다.

초급장교는 용기와 체력이 강해야 하고, 고급장교는 정신적인 용기와 지혜 그리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초급장교 시절부터 꾸준히 노력하고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보병 장교

1959년 4월 육군사관학교 졸업 1개월을 앞두고 생도대장 최주종 장군은 졸업생(임관장교) 176명을 식당에 교번 순으로 앉히고 육군본부에서 하달한 병과분류를 위한 면담을 실시했다. 보병 100, 포병 38, 공병 25, 통신 10, 기갑 3명이었다. 문제는 보병 지원자가 77명으로 23명이 부족했는바 설득, 조종을 하기 위한 자리였다.

“5중대장생도 이진삼 일어나. 제1, 제2, 제3 지원 모두 보병 맞나?”

“맞습니다.”

“잘 생각했다. 앉아!”

10초 만에 끝났다.

전투 시에 보병 소위는 소모 소위라는 말이 있다. 격렬한 전투 3번이면 사망 아니면 부상으로 후송한다. 선후배들은 내가 보병을 지원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직업(병과) 선택

★3대 요소

·적재적소(適材適所) ·직장취미(職場趣味) ·능력발휘(能力發揮)

★3대 특성

·성격(性格): 용감(勇敢), 침착(沈着), 견인(堅忍)

·기질(氣質): 치정(緻精), 쾌활(快活), 간단(簡單)

·행동(行動): 신속(迅速), 정확(正確), 비밀(秘密)

나는 동기생들에게 듣기 좋은 이유를 말했다.

“포병은 수학을 못하니 아군 머리에 포탄을 쏠 것이고, 공병은 도로든 교량이든 설계도 못하고, 통신은 전기를 모르니 불통이고, 기갑은 지형, 기상, 시계에 제한이 있고, 답답하여 소규모 병과에 가지 않겠다. 보병 구호는 ‘나를 따르라’ 포병은 ‘알아야 한다’ 공병은 ‘건설과 파괴’ 통신은 ‘통하라’ 기갑은 ‘번개와 같이’라는 구호를 나는 기억한다.”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부하들과 같이 몸을 던져 목표를 점령, 태극기를 꽂기 위해서는 ‘나를 따르라’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구호라고 생각했다. 무더운 삼복더위 훈련 중 공격을 위한 집결지로 170여 명의 중대원과 행군하는 나를 보고 타 병과 동기생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면서 “이진삼, 수고해” 위로하는 듯 보였다. 나를 믿고 따라오는 우리 부하들, 콩나물국, 김치에 보리밥(압맥8 대 쌀2) 먹고 당당히 행군하는 모습을 국가를 위한 최고의 충성으로 표현하고 싶다.

1961년 9월, 1군사령부 부관참모로부터 출두지시를 받았다. 그는 육사7기 특기 이규선 대령으로 외할머니와 같은 전주 이씨이며, 조카로 초등학교 시절에 본 적이 있었다.

“이 중위, 전방에서 고생이 많다. 이번에 미국유학 기회가 있다. 5개 병과 병기, 수송, 병참, 헌병, 부관 중 선택해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안 가겠습니다. 육사 생도대장과 김기태 대위 등 선배들이 5중대장생도 이진삼은 보병으로 보내자는 토의가 있었습니다.”

이 대령은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동기생들이 전방 연대장 하고 있는데 그들은 장군 바라보지만 나는 장군 된다는 보장이 없다. 이진삼, 군 생활 잘하여 장군 되기 바란다.”

“여하튼 배려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원주-청량리-대광리행 열차로 귀대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빗발치는 완행열차 창가에 기대앉아 전선으로 달린다. 충성 한 가닥에 목숨 걸고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이 나라를 지키겠다. 초지일관 전진할 뿐이다. 안일(安逸)을 택하였다면 나는 군인의 길을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길도 중요하지만 방향은 더 중요하다. 젊은이여, 꿈을 가져라. 꿈꿀 힘이 없는 자 살 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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