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 선비의 화 – 김정과 그의 조선’, 이달 31일까지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열려
'1519 선비의 화 – 김정과 그의 조선’
그동안 기묘사화의 주인공은 정암 조광조(趙光祖)였으나, 이 전시를 통해 중종대의 정치 개혁에는 조광조 이전에 ‘김정’이 있었음을 알린다.
아울러 사화를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좁은 해석에서 벗어나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통치철학과 권력구조 위에서 사화의 발생 원인과 의미를 되짚어 본다.
이와 함께 16세기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조선왕조의 정치와 통치철학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
김정 선생은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직후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삼사에 배속된 후 목도한 당시 조정은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등 반정세력 핵심 삼대장들과 그들이 임명한 117명의 정국공신(靖國功臣)들에 의해 장악된 정국이었다.
새로 추대된 중종은 반성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아내조차 지키지 못할 만큼 무기력했다.
1515년 순창군수를 지내던 김정은 당시 담양부사였던 박상과 함께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정국에 김정이 올린 한 장의 상소는 큰 파란을 불러왔고, 이후 새로운 개혁세력들이 등장했다.
중종이 보위에 오른지 10년, 조광조의 등장과 김정의 귀환은 교착된 정국에 변화를 알렸다.
이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조선왕조의 통치철학과 국가운영의 기본원리를 되묻는 본질적이고 급진적인 각종 개혁안들을 기획했다. 특히 김정은 이상적인 ‘유교국가 조선’을 실현하고자 했고, 타협을 모르는 ‘개혁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에 위기감과 분노를 느낀 공신세력들이 반격을 꾀하자 중종이 조광조에 대한 지지를 거두며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결국 김정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한마디로 풍운의 삶을 살다 일생을 마감한 김정 선생이다.
행복청 대변인을 역임하고 고양도시관리공사 사장으로 재직 중인 김홍종 사장이 충암 김정 선생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