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나는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우는 것은 그들이 이전에 같은 그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더라도 어떤 알아봄의 감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멈추게 하고, 도시의 소음을 가라앉히고, 보는 사람을 그림 속에 살게 만드는, 갑작스럽게 이뤄지는 총체적인 동일시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유사한 무언가를 알아보는 인식이며, 그 일부가 되는 경험이며, 어쩌면 은총의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순간에 대한 느낌일지도 모릅니다. - 네덜란드 할버쉼에서 메리 뮬러 올림.

이녁에게 무엇 하나 물어 보자! 미술관의 ‘어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으신가?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교수인 제임스 엘킨스는 엉뚱한 질문을 신문과 잡지에 실었다. 또한 유명 미술애호가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답장을 부탁했다. 눈물이 말라버린 시대- 그러나 뜻밖의 결과였는데 총 400여 통 이상의 회신을 받았다.

《그림과 눈물》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인데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눈물’로 나뉘었다고 분석했다. 첫 번째는 그림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고, 복잡하고, 압도적이거나, 어떤 식으로든지 제대로 바라보기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두 번째는 그림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어 있고, 어둡고, 고통스러울 만큼 광대하며, 차갑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해하기에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림 앞에서 운다는 것이다.

엘킨스는 답신들 중에 32통의 사연 전문을 부록에 실었다. 네덜란드 중부도시의 미술사학자 메리 뮬러의 편지는 이 책을 잘 요약하고 있다. 너무 가까이거나, 멀게 느껴지는 총체적인 동일시 속에, 무언가 알게 되어 행복한 순간을 맛보는 경험- 그녀는 친구들 역시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데 자신은 자주 운다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오딜롱 르동(1840-1916)의 파스텔화 앞에서 글썽였노라 고백했다.

나로서는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이따금 울컥하지만 전시장의 ‘작품’ 앞에서 운 적은 없다. 그러나 울음의 실체는 Ch. 보들레르(1821-1867)의 시 ‘달의 슬픔’을 통해 얼추 알고 있다. 단백색 조각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는 / 파리한 달의 눈물 손 안에 걸어, / 해의 눈 못 미치는 가슴 속에 간직한다.(《악의 꽃》제65 ‘달의 슬픔’ 마지막 연). 바로 이효석의 단편《메밀꽃 필 무렵》의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것이다. 소금이나 메밀꽃은 햇빛 닿지 못하는 그 심연에서 솟는 단백색의 파리한 눈물과 참 많이 닮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해’는 ‘하다’의 시킴꼴로, 달은 ‘달다’의 이름꼴로 새겨왔다. 해가 떴으니 순명해 어떤 일이라도 하는 터라 울고불고 할 겨를이 없다. 하지만 밤이면 낮 동안의 일을 양손에 쥐고 잘잘못을 재면서 한숨도 내쉬고, 미어지는 가슴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달이 먹먹한 속사정 닮은 먹구름 벗어나면 새하얀 두 눈의 물줄기가 드러난다. 산다는 것은 얼마간의 대가를 치르는 법. 해의 낮에 수고한 몸을 밤의 달은 그렇게 위무해주는 것이다.

제임스 앨킨스는 ‘나오는 글’에서 작품들을 강렬한 만남을 위한 몇 가지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미술관에 혼자 가라, 그리고 모든 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고, 스스로 생각하며, 일단 한 점과 시간을 보내고 훗날 다시 보러오겠다고 자신과 약속하라고 권면한다.

1972년 어느 봄날, 기억나는 건 그게 전부다. 나는 세인트폴에서 기차를 잡아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위스콘신 초원을 건너, 시카고로 갔다. 그리고 이제, 싸구려 호텔에 막 체크인하고는 친구를 만나러 내가 알지 못하던 곳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로 서둘러 가는 참이었다. - 퍼트리샤 햄플.《블루 아라베스크: 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혼의 여행》

현재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 살고 있는 그녀는 미네소타대학의 평의원 교수이자 맥나이트 특훈교수로 문학평론가이며 여행기를 쓰는 유명한 퍼스널에세이스트이다. 그곳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그림과 눈물》의 저자 제임스 앨킨스를 스쳤거나, 만났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친구와 약속한 그 미술관에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어항 앞의 여인’(캔버스에 유채. 81.3x100.3cm. 1921-23)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위에게 연이은 전시실을 지나 카페테리아로 가는 길을 확인한 햄플은 문득 ‘황금빛 액자에 끼워져 있는 커다란, 약간은 우중충한 그림’ 앞에서 멈추게 되었다. 흩뿌려진 솔방울들이 놓인 테이블, 받침대가 있는 어항의 금붕어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여인, 여자 뒤의 푸른 아라베스크 장식의 스크린... “움직일 수 없었고, 왜인지 말할 수도 없이, 그냥 거기 묶여버린” 그녀는 작품과 한순간의 ‘총체적 동일시’를 이렇게 풀었다.

나는 울지 않았지만 이미지에게 얻어맞았다. 그림이 표현하는 게 무엇인지, 그 그림으로부터 직관적으로 느끼는 게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림이 말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을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바보스러운 직업을 얻었고, 도통 ‘재주’라고는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남자 친구와의 짜증나는 생활, 이런저런 뻔한 꿈같은 꿈, 넘쳐나는 불평뿐이었다. 마침내 해방된 영문학 전공생.

가늘게 정돈한 눈썹의 평온한 선 아래에서 오렌지 빛 물장구를 주목하는- 어항 물고기의 모양과 크기의 흔들리지 않는 눈의 여인. 햄플은 작품 속 그 여자의 열정과 냉정을 자신으로 환치하고, 마침내 프랑스 남부 지중해 코트다쥐르의 물고기가 되어 앙리 마티스의 ‘하렘과 오달리스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한다.

그림은 보는 행위를 그려야지 보이는 대상을 그려서는 안 된다. 그 대상이 완전히 이국적인 세계를 나타내더라도, 이는 자아의 베일을 거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게 예술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책을 탐독하는 이유는 아직 만나지 못한 진정 한 권의 ‘책’을 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내 안의 ‘그림’을 만나지 못해서가 아닐까? 순우리말인 그림은 동사 ‘그리다’의 명사형이다. 무엇인가 간절히 곡진하게 바라고, 그리는 마음 없이는 그 어떤 그림도 그저 종잇장에 불과할 뿐이다.

목불견目不見. 일찍이 장자의 친구 혜시가 정언했다. 눈은 사물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 눈은 그냥 뚫어진 살가죽에 지나지 않는다. 빛이 없으면 사물을 보지 못하듯 저마다 마음과 혼이 내는 ‘눈길’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다. 새롭게 눈길과 발길, 꿈길 내는 이 새봄에 마음에 그리던, 그림 만나러 미술관에 가고 싶다. ‘해의 눈 못 미치는 가슴 속에 간직한’ 그 눈물 흘리러 말이다.

도연명(365-427)의 시구일 것이다. 갇힌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 도랑의 고기는 옛 연못을 생각한다네- 아직도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이 걸려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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