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수색중대 새끼 호랑이

“김 상사, 호랑이 나타났다. 호랑이 나타났어!”

“야, 이진삼 나타났다.”

하사관들이 수군거렸다. 수색중대에서 6개월쯤 지났을까, 갑작스레 나는 사단장의 호출을 받고 불려갔다.

“이진삼 소위 사단장님께 불려 왔습니다.”

준장 양중호 사단장은 밝은 표정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 소위, 어서 오게. 이 소위가 전쟁 경험이 있는 중·상사 교육을 맡아줘야겠다. 전쟁 경험이 많은 하사관들의 문란한 군기를 잡아야겠어.”

이들 대부분은 6·25전쟁에 참전했고, 군기 문란한 중사, 상사들로 학력은 낮지만 경력이 많아 군의 많은 일들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다보니 초급장교를 우습게 아는 중‧상사들을 새롭게 교육시켜야 했다. 말하자면 위계질서를 세우기 위한 군기(軍紀) 교육이 필요했다. 이후 하사관들의 군기 교육을 맡은 내게 붙은 별명은 ‘호랑이’였다.

사단 내 780여 명의 하사관들을 2주에 50명씩 8개월에 걸쳐 사격을 비롯해 화기학, 소부대전술, 지휘통솔학 등 보병학교에서 배웠던 과목을 중점으로 훈련시켰다. 임무수행을 위한 초등군사반과정(OBC : Officer‘s Basic Course)이었다. 나는 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지도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했다. 사단 누구로부터도 교육지침이나 명령 또는 지시를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알아서 했다. 정신 무장을 위해 한밤중에 고지로 뛰어가게 한다거나, 개울과 호수의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게 하기도 했다. 내가 솔선수범하니 하사관들은 불평 없이 따랐다. 그러는 사이 나는 사단에서 유명한 장교가 되었다. 내가 나타났다 하면 모든 하사관들이 벌벌 떨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를 무서워한 것은 아니었다. 교육대를 수료한 하사관들은 모여 앉으면 수료하지 않은 하사관들에게 교육받은 내용을 말하며 겁을 주었다. 낙제한 중‧상사는 2주 후 재입교해야 했다. 재입교를 않기 위하여 입교를 미리 준비하는 하사관들을 본 전 장병들의 정신자세가 사단 군기까지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로서는 군 생활 중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고단한 기간이었으나 25사단의 군 기강과 근무자세 확립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양중호 사단장님께 감사드린다.

 

3·15부정선거와 4·19혁명

1960년 3월은 어느 때보다 세상이 어수선했다. 곧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예정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민주당인 야당에서는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으로 내세웠다.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은 미리 선거 결과를 분석,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았다.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가 2월 25일에 사망하는 바람에 대통령은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선거의 초점은 당시 85세의 노령이었던 이승만의 유고 시에 승계권을 가질 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여당과 정부의 야당 선거운동을 방해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지시된 부정선거 계획의 내용을 보면, 40퍼센트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무효표 조작,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 발표 등 최악의 부정선거 책략이었다. 이러한 음모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폭로되었다. 세상이 어수선했다. 군 내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육대 전 요원은 부재자 투표를 위해 2주간 원대복귀 명령을 받았다.

3월 5일 사단 특무대(방첩대)에서 교육대 전 요원을 대상으로 모의 투표를 실시했다. 그들이 나눠주는 번호가 찍힌 투표용지를 받아 투표를 하게 했다. 투표용지만 보면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알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모의 투표였다. 말하자면 이승만·이기붕에게 100퍼센트 투표하려는 집권 여당의 꼼수였던 것이다. 당시 군 병력이 60만 명이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군은 당락을 좌우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나는 모의 투표에서 집권 여당을 찍지 않았다. 나로선 여당의 꼼수에 부응할 순 없었다. 소신껏 투표했다. 그러자 투표용지에 찍힌 번호로 나의 투표 내용을 알게 된 특무대는 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D-9일 전, 선거를 앞두고 교육을 받던 부대원들 모두가 부재자 투표를 위해 원대복귀를 했다. 나도 수색중대로 복귀를 준비했다. 하지만 나는 복귀를 해도 파견 나와 있던 터라 보직이 없었다. 이를 놓칠세라 특무대의 백순영 중위가 교육대로 나를 찾아왔다.

“이 형, 보신탕 먹으러 가자우!”

이북 출신의 그가 능청스럽게 다가왔다. 그보다 나이가 4살 어린 나였지만 그는 내게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

“이 형, 그동안 고생했으니 휴가 좀 다녀오시죠!”

그들은 내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군의 투표 100퍼센트 달성에 응하지 않을 것을 알고 꼼수를 쓴 거였다.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했으나 교육을 받던 부대원들이 모두 원대 복귀한 마당에 나 혼자 교육대에 남아 있을 수 없어 고향으로 향했다.

3월 15일, 드디어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집권당인 자유당은 사상 유례가 없는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선거운동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 인사 폭행,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부정 개표 등 별의별 부정이 다 자행되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 이승만 963만 표(85퍼센트), 이기붕 833만 표(73퍼센트)로 당선 발표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규탄하는 학생 데모가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초로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 시위 진압 도중 경찰의 실탄 발포로 최소한 8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어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서울에서도 연일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과 야당은 물론이고 시민 교수들까지 가세했다. 결국 1960년 4월 26일에 이르러 이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下野)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4·19혁명이 성공한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군의 태도였다. 군 장병들이 3·15부정선거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학생, 시민, 교수들의 시위에 동조하였다.

생도 시절, 우리는 국민의 뜻을 정확하게 읽지 못하는 자유당 정권을 걱정하며 월간 <사상계>를 읽었고, 매주 수요일마다 자치활동 시간에는 법무참모인 조성각 중령과 함께 토론을 하곤 했다. 당시 <사상계>의 발행인은 김구 선생의 비서를 역임했고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한 동대문지역 국회의원이었던 장준하 박사였다. 육사생도들은 자유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구 선생은 누가 죽였나?’를 두고 깊은 토론을 했다. 우리는 당연히 3·15부정선거를 치르는 것을 보며 울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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