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공자께서로 무성에 가시어 현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를 들으셨다. 선생께서는 빙그레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자유가 대답하였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는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아. 언의 말이 옳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일 뿐이다.” -《논어》제17편 ‘양화’ 4장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평소 겸손하고 과묵하여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던 공자가 농담을 했다. 자유는 공구보다 45살 아래의 제자로 성이 언言, 이름은 언偃이었는데 노나라의 작은 고을 무성읍장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천 5백여 년 전 어느 봄날. 언언은 노스승 곁을 떠나 벼슬에 올랐으니 은혜도 갚을 겸 편달되고 싶어 초대했으리라.

공자는 조촐한 자리면 그만인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는 성대한 연회를 마련했느냐고 떠본 것이다. 합석한 제자들 역시 읍장의 접대치고 과하다 여겨 진담으로 여겨 긴장했다. 그러나 자유는 곡진한 대답을 내놨는데《논어》제3편 ‘팔일’ 24장에 그 일말이 엿보인다. 위나라의 한 관리가 공자를 뵙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안내해주었다. 잠시 후 그가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은 어째서 공자께서 벼슬이 없으심을 걱정하십니까? 천하의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늘이 앞으로 선생님을 세상의 목탁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13년의 주유천하 그날을 깊이 새긴 언언은 스승을 더욱 따르고, 학문을 연마하여 관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에게 공자는 어느 황제보다 지극히 경외로운 존재였다. 그러기에 선생이 자신을 ‘닭’이라 비유하자, 도를 깨우쳐주신 ‘소’이시니 합당한 예우라고 말한 것이다.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인재를 얻었느냐?” 제자가 말씀 드렸다. “담대멸명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길을 갈 때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고는 저의 집에 찾아 온 적이 없습니다.” -《논어》제6편 ‘옹야’ 12장

담대멸명의 자는 자우로 훗날 공자의 72제자에 꼽히는데 자유보다 9살이 많았다. 연하의 읍장을 모시지만 요행과 운수를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정사를 돌본 인물. 바로 공자의 군자에 부합하는 인간상이었다.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촌스럽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형식적이게 된다.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후에야 군자다운 것이다.”(‘옹야’ 16장) 공자는 첫 부임지에서 인사차 들른 자유에게 물었고, 훗날 무성으로 원행했으니 그저 웃으며 형식인 아닌 제자의 진정성을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날 ‘현가弦歌’의 광경은 어떠했을까? 이런 궁금증은 5년 전 귀향해서《논어》를 정독하며 더해졌다. 소백산맥 민주지산의 충북 영동은 박연(1378-1458)선생의 출생지이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인 난계는 조선 세종 때 문신이자, 12율관을 정하고 궁중음악과 예법을 전면적으로 개혁한 음악가였다. 특히 피리笛 명연주가로 폭포아래에서 연주하면 새와 난초들이 춤을 추었다 전한다. 그곳이 심천면의 박연폭포이다. 분명히 난계선생은 그 누구보다 유가 예악론의 정수인《논어》에 심취하셨으리라.

공자께서 노나라의 태사에게 음악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음악은 배워 둘 만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여러 소리가 합하여지고, 이어서 소리가 풀려 나오면서 조화를 이루며 음이 분명해지면서 끊임이 없이 이어져 한 곡이 완성되는 것이다. -《논어》제3편 ‘팔일’ 23장

시에서 감흥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 자립하고, 음악에서 완성을 이룬다- 공자는 삶의 최고 경지를 음악에 비유했다. 태사는 음악을 관장하는 벼슬인데 실제로 공구는 연주가이자 평론가, 교사였다. ‘자한’편 14장이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야 음악이 바르게 되어 아雅와 송頌 이 각각 제자리를 찾았다.” 여기에서 아는《시경》의 ‘소아’와 ‘대아’를 가르키고, 송은 ‘주송’, ‘노송’, ‘상송’을 말한다. 총 305편의 시가 실린《시경》은 풍과 아, 송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작자를 알 수 없는 고대 중국부터 불리어진 민요를 중심으로 편찬된 것이다.

공자의 음악적인 면모는 위나라에서 경쇠를 두드리며 연주했다거나(‘헌문’ 42장),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양화’편 20장),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잃으시고, 음악을 하는 것이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술이’ 13장), 옛사람들은 예와 음악에 있어서 야인처럼 질박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군자처럼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만일 내가 마음대로 택하여 쓸 수 있다면 나는 옛사람을 따르겠다(‘선진’ 1장) 등《논어》전편에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그토록 음악을 높이 산 것일까? 역시《논어》에 답이 있다. ‘양화’ 18장에서 공구는 이렇게 밝혔다. “자주색이 붉은색을 침해하는 것을 미워하고, 정나라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기민한 말재주가 나라를 뒤엎는 것을 미워한다.” 이는 11장의 반문에 대한 자답이다. “예禮가 어떻다, 예가 어떻다 말들 하지만, 그것이 옥이나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음악이 어떻다, 음악이 어떻다 말들 하지만, 그것이 종이나 북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그렇다. 고대의 예법에 따라 주고받던 대표적인 예물인 옥과 비단- 그것들의 많고 적음, 비싸거나 저가가 그 사람의 진정성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아부로 빌붙으려는 자는 분에 넘치게 장만할 것이고, 작은 성의마저 표할 형편이 못되면 적어도 진심이 담기는 법. 정작 중요한 것은 악보에 없듯이 북이나 종은 도구일 뿐 음악 자체는 아니다. 곧 연주자의 손에서 가락이 풀려난다. 최고가의 악기도 초급자에게는 그만한 소리를 내어 줄 뿐이다.

여기에서 브람스, 말러, 요하임 등 당대 최고 음악가의 연주회가 열렸던 비트겐슈타인궁의 ‘재벌 2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언어게임론’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물리적인 기호의 배열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정신작용이나 세계의 그림도 아니며, ‘일정한 생활양식’과 ‘규칙’에 따라서 영위되는 행위이다. 이 ‘언어’에 공자의 ‘예와 음악’을 환치하면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말과 예, 음악은 모두 저마다 마음가짐의 체현인 것이다.

공자계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어서 인仁하지 못한다면 예의를 지킨들 무엇하겠는가? 사람이 되어서 인하지 못한다면 음악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논어》제3편 ‘팔일’ 3장

누가 닭이고, 누가 소인가? 소 잡는다고 닭 잡는 그것을 들고 설치는 무리들. 닭 잡는다고 소 잡는 칼 들고 나대는 패거리- 천하의 칼잡이에게 두 칼은 일습의 어느 한 칼에 지나지 않는다. 봄은 동사 ‘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새롭게, 제대로 보는 눈이 열리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새봄이길 비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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