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훈육관 같은 아버지

나의 치기(稚氣) 어린 행동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4년 가을, 부여로 수학여행을 온 수원농고 학생들과 부여고등학교 학생들 간의 집단 충돌이 있었다. 학도호국단 규율 부장이었던 나로선 지나칠 수 없었다. 가담을 했고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지겠다며 경찰 조사를 받았다. 책임의 대가는 퇴학 처분이었다. 막상 퇴학 처분을 받고 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님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저녁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자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목이 콱 막혔다.

“그만한 일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사내 녀석이 말이야, 괜찮다. 다시 대전고등학교로 가라.”

아버님의 말씀은 매 맞는 것보다 더 아팠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병으로 입대, 강원도 인제 7사단 보충대 본부 신병 보직계에서 5개월을 근무하고 사관학교 꿈을 가지고 휴가를 얻었으나 졸업 예정 증명서와 성적 증명서에서 제동이 걸렸다. 자격도 없이 육사를 지원하면서 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육군사관학교 응시지원 구비 서류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번에도 해답은 아버지였다. 당당하고 치밀하게 행동하면서 품위를 떨어뜨리는 법이 없으며,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결단할 때는 자로 잰 듯 단호한 아버지는 학교로 향했다.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모습은 감동할 만큼 진지했으며 자기의 피로 새끼를 살리는 펠리컨처럼 보였다. 학교장과 훈육주임을 만나 해결하고 오셨다.

“내일 학교에 가서 김달수 훈육주임을 만나고 와라.” 하시고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육사에 입학한 것은 부정(父情)의 결과였다.

육사 생도 때 혼자 책임지겠다는 주의로 내가 만약 퇴교 조치를 당했더라도 아버지는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사내 녀석이 말이야, 그만한 일로 세상 무너지지 않아. 사내답게 사내답게 행동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아버지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시던 말과 행동은 복사한 듯 고스란히 내 몸과 내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1955년 3월 내가 육사 입학시험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내게 라도(RADO) 야광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1959년 5월 27일 소위로 임관하던 날, 종로 한일관에 모인 가족들 앞에서 내 손목에 새 시계를 채워주시며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장군 계급장을 단 내 모습을 못 보고 돌아가신 것이 한스럽다. 1980년 1월 1일에 장군 계급장을 단 나는 그 길로 13년 동안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고향의 산소를 찾았다.

“멋지다, 내 아들!” 하며 장군이 된 내 모습에 세상 누구보다 더 기뻐하실 아버지시다. 산소에 동행한 친구들과 함께 아버님이 고교 축구 시합 출전금을 주셨던 이야기 등을 하며 성묘를 했다. 그러던 중 울음을 터트린 나를 위로하며 친구들도 함께 울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버님은 1909년생으로 26세부터 광산(鑛山) 전문가로서 충남 청양군 장평면 화산중석(重石) 광산과 청양군 사양면 구봉광업소장으로 계셨으며, 33세인 1942년부터 36세인 1945년 8월까지는 황해도 송화에서 금광(金鑛) 소장으로 계셨다. 해방되면서 고향인 부여군 은산으로 귀향하시어 구봉광업소에서 1개 광구를 맡아 금광을 운영하면서 노다지를 발굴하여 부자가 되셨다. 방학 때마다 광산을 방문하여 객실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1954년 고등학교 3학년 때, 구봉광업소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젊고 건장한 체구의 두 건달이 술에 취해서, 45세인 아버님에게 돈을 요구하며 무례하게 굴었다. 나는 밖으로 끌어내 한 놈에게 발을 걸면서 주먹을 한 방 날려 하수구로 넘어뜨렸다. 다른 한 놈은 달아났다. 아버님은 하수구에 빠진 건달에게 치료비를 지불하셨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으셨다.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마디만 하셨다. 나는 육사에 진학하고 동생 이진백은 기계체조 선수로 건장하고 체력도 강했으며 방학 때마다 친구들과 광산을 자주 방문하곤 하여 주위에서 감히 아버님에게 시비를 거는 자가 없었다. 기분파이신 아버님은 친구들에게 용돈도 두둑하게 주셨다.

금광은 인부들과 2종류의 고용관계가 있었다. 매일매일 정해진 인건비를 지급하는 관계와 성과에 따라 전체 소득의 반을 인부들에게 균등 배분하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금을 캐지 못하면 인부들의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님은 다른 광구와 달리, 성과에 관계없이 인건비의 1/4을 지급해서 인부들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주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근무교대 후 막걸리와 돼지고기로 회식을 하였다. 사기충천한 광원들의 작업능률이 오르면서 타 광구와는 관리와 고용 차원에서 경쟁이 되지 않는, 한 차원 높은 경영을 하셨다. 종업원들의 소득이 증대하자 유능한 인부들이 몰려왔고 사고도 없었다.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너는 객실에 가서 밥 먹어라. 내 도시락 가져와!” 하시면서 인부들의 보리밥과 강제로 바꾸어 드시는 것을 종종 보았다. 아버님의 이러한 행동은 군 생활을 하는 내게 은연중에 사표로서 자리 잡았다.

광석을 분쇄기에 넣기 좋도록 광석을 깨는 여성 인부들에게 20분 간격으로 5분씩 일어나 허리 펴기 운동을 하고 쉴 기회를 주셨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단장하였으며, 여름에는 차광막을 설치해 햇볕과 비를 막아 주고, 겨울에는 방풍 작업장을 만들어 주었으며, 갱도 입구에는 큰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 24시간 공급해 주셨다. 작업 유의 사항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었다.

유능한 광부들이 모여들자 타 광업소보다 130% 이상 작업능률이 향상하였고, 광부들 스스로 4교대 근무를 사양하고 8시간씩 3교대 근무를 함으로써 인건비를 절약하겠다고 건의했으나 아버님은 무리한 작업은 안 된다며 4교대 근무를 유지하셨다.

대부분의 광부들은 교대를 하면서 도시락을 싸온 그릇에 광석을 가져가곤 했다. 감독관이 이를 감시 조사하자, 아버님은 “감시하지 마라. 광석을 집에 가져가 작업해서 1년에 송아지 한 마리를 장만한다는데 놔두게, 괜찮네.”라고 하셨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지시가 있자 인부들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졌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버님을 뵐 때마다 정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다. 평소에 외할머니께서 하신 “나는 네 아비(사위)와 네(외손자)가 우리 집안의 대들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우리 아버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은 경우를 저버리고 살면 안 된다. 정도를 걸으며 살아야 한다.”라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

방학이 되면 그 당시 기억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졌던 막장에 들어가 착암기로 바위에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삽입하여 폭파하는 장면을 자주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광부들을 교대로 광차를 몰고 갱도 밖으로 나와 안전하게 대피하면서 동시에 휴식도 취하고 다시 갱도로 들어가 작업하도록 배려하시는 아버님의 지혜와 인품에 놀랐다. 내가 장군이 되어 제4땅굴을 발견하게 된 것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땅굴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고 믿는다.

 

졸업

졸업을 앞두고 국내 저명인사들의 특별강연을 많이 들었다. 그중 백남권(13대 교장, 소장) 교장의 초청으로 특별강연에 나섰던 김철안 여사의 말은 지금껏 죽비 소리로 생생하다.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 잘못되면 집안을 망치고, 고등학교 나온 사람이 잘못되면 사회를 망치고, 대학교 나온 사람이 잘못되면 나라를 망친다.”

처음 김철안 여사의 강연을 들었을 땐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향한 일침이자 일격이 아닐 수 없다. 많이 배우고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잘못하면 나라를 크게 망쳐놓으니 말이다. 또 터키 대사였던 정일권(예비역 대장) 대사의 수양 강연도 기억에 남는다.

“터키 대사로 재임하면서 막강한 우리 한국군이 있기에 외교무대에서 당당히 활동할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사관생도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정일권 대사의 강연은 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참다운 군인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1959년 5월 27일, 드디어 졸업식 날이 밝았다. 졸업식은 화랑연병장에서 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을 비롯해 3부 요인, 주한 외교사절, 군 장군, 내외 귀빈, 가족,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이 대통령은 이날 치사를 통해 졸업생들의 진로와 사명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제시하고 통일의 선구자가 될 것을 당부했다.

“육사의 교육은 군 지휘관을 양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분야를 책임질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명심하고 애국심을 발휘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달라.”

가족과 선배 장교들이 계급장을 달아 주는 것으로 졸업식은 끝이 났지만 나에게는 육사에서의 4년은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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