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환 언론인 (전 관훈클럽 총무) / 뉴스티앤티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 하면 강성리더십의 대표선수다. 필자가 영국 특파원을 할 때는 대처의 전성기였다.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그의 정치신념은 너무도 확고하여 노조는 물론 야당인 노동당과도 항상 충돌을 빚었다. 시사만평가들도 대처를 묘사할 때 흔히 부리가 뾰족하고 무섭게 생긴 독수리 인상을 그렸다. 야당은 그를 독재자(dictator)라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대처는 기록적인 장기집권(11년)을 누렸다. 그것도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됐다는 나라에서 독재자 소리를 들으면서...

그런데 그런 총리에게 공개적으로 대든 장관이 있었다. 나이젤 로손(Nigel Lawson)재무장관이었다. 재무장관은 내각 권력서열 2위다. 영국 총리의 관저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라는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으나 다우닝가 11번지가 재무장관의 관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인자가 1인자에게 달려들었으니 보통 사건이 아니다. 발단은 대처가 경제고문의 의견을 중시하여 정책을 결정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경제고문을 총애한 나머지 재무장관이 물을 먹는 일들이 잦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참고 참던 끝에 로손장관은 대처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그것을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친애하는 총리’(Dear prime minister)로 시작된 문제의 서한은 나의 정책수행에 장애가 되는 경제고문을 언제까지 해임하지 않으면 내가 장관을 그만두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그가 제시한 시한까지 대처가 조치를 취하지 않자 로손장관은 즉각 사임하고 관저를 떠났다. 대처가 크게 한 방 맞은 것이다.

이제 문재인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민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낮은 자세 때문에 많은 박수를 받고 있지만, 공직자와 지도층의 알아서 기는 고질병이 언제 도질지 모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재벌들의 ‘알아서 기기’다. 그들은 문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조간신문부터 대문짝만한 축하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경쟁이라고 하듯이 며칠간 계속됐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수사를 받았고 아직도 그 사건들은 계속 중이다. 이런 값비싼 축하광고는 결코 환영할 일이 아니다. 공짜 점심은 없다. 이런 과잉행위가 정경유착의 고리이며 작은 시작이 되기 쉽다. 권력자가 그런 광고를 보고 혹시라도 ‘회장님’에게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때부터 어깨동무가 시작되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며 상식이다.

이제 개헌논의도 활기를 띨 조짐이다. 최순실 사건의 원인이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는 것처럼 헌법 탓을 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헌법을 아무리 고쳐도 알아서 기는 공직자들의 행태가 변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최순실’이나 문고리 권력, 십상시의 발로를 막기는 어렵다. 잘못된 정치가 헌법의 문제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다. 앞서 거론된 영국의 로손장관 같은 소신파가 단 한 명만 있었어도 최순실 사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소신 행위는 헌법사항도 아니다. 일국의 장관으로서 양심과 신념에 따라 할 일을 하려고 한다면 가능한 것이다.

헌법 탓하기 전에, 있는 헌법이라도 잘 지켰으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은 실패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헌법에 있는 대로 총리나 장관이 권한을 행사한다면 제왕적 대통령이 나올 수 없다. 즉 총리가 장관을 인선해서 적임자를 제청한다면 그것이 바로 책임총리용 분권이다. 또 장관이 국정을 심의 의결하는 국무위원으로서 헌법상의 권리만 제대로 행사해도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다.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기는 한, 어떤 헌법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와 장관들이 하던 행태를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수천 수만의 부하직원을 거느린 일국의 장관이라는 사람들이 대통령의 ‘말씀’을 놓칠세라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면서 받아 적던 모습, 이것이 언필칭 민주화가 되었다는 대한민국 공무원의 현주소요 의식 수준이다. 어떤 헌법도 이런 공직자들의 수준과 알아서 기는 버릇까지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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