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뉴스티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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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부

나는 특기를 축구라 하고 육사에 들어왔으나 정작 축구부에는 가입하지 않고, 태권도부에 들어갔다. 이유는 축구를 하게 되면 학과 공부를 따라갈 수 없어 퇴교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수요일 체육의 날 오후, 4학년인 축구부 주장 최병진 생도가 신입생 명단을 들고 나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 태권도부에 있던 나를 발견하자마자 감정을 실어 힘껏 주먹을 날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굳이 그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술과 입안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뱉지 않고 삼켰다.

“인마, 너 왜 축구부에 오지 않고 엉뚱한 데 와 있는 거야?”

그의 표정은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맞으면서도 꿈쩍 않는 내 모습에 놀란 모양새였다. 순간 고등학교 때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1954년 국가에서 양력설을 장려하던 시절, 음력설에 한복을 차려 입고 학교에 출근한 법학 선생님을 본 남궁균이 친구 이름을 부르듯 말했다.

“어라? 정용환이 한복 입었네!”

이를 들은 정용환 선생님이 교실로 쫓아 들어와 벌컥 화를 냈다.

“누구야? 누가 그랬어. 앞으로 나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이진삼이, 이리 나와!”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동시에 선생님의 어퍼컷이 가슴께로 옆구리로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억울했지만 나는 꼼짝 않고 꼿꼿이 서서 선생님의 분풀이를 받아냈다. 25년이 지난 1980년, 장군이 되어 모교 졸업식에 참석했을 때 이를 기억하는 동창회장 심상기는 공식석상 마이크 앞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기 앉아 계신 이진삼 장군, 자기가 하지도 않았으면서 그 매를 꼿꼿이 맞는데……, 거기 있던 학생들이 이진삼의 오기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런 여러분의 선배 이진삼이 우리 학교에서 최초로 장군이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직선이다. 사내답게 변명하지 않는 것, 물귀신처럼 다른 사람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 비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나이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아무도 모를 것 같아도 최소한 세 사람은 알고 있어서다. 일을 저지른 사람,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 그리고 하느님. 중국의 고전 《후한서后漢書》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당신이 알고 그리고 내가 안다.”

나는 축구부 주장 12기 최병진의 동기생이자 고향 선배 이규환의 도움으로 축구부에 들진 않았지만, 대대 대항 축구시합이 있을 땐 대표로 뛰어야 했다. 4학년이 되어서야 내 마음대로 태권도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육사에 들어오기 전 이미 축구, 복싱, 기계체조 등 운동은 다른 사람이 1년을 해야 할 것을 나는 한두 달이면 따라잡았다. 보병학교 교관 시절 특공무술, 참호격투, 신총검술 등 교범 제작을 육군본부 명을 받아 창안하였다. 이런 이유로 특공대장을 시작으로 기동대장, 체육부대(사격지도단)장, 공수여단장 그리고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 체육과 관련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제가 떠들었습니다

 

“이진삼 생도, 생도대 본부로 출두하라.”

3학년이었던 1957년 9월, 나는 느닷없이 생도대의 호출을 받았다. 생도대로 가는 내내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호출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생도대로 들어선 순간 나는 매우 놀랐다.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발단은 병과학교(보병학교) 7~8월 하계 군사훈련을 가던 중에 있었다. 용산에서 열차를 타고 광주로 이동 중 오락회를 했었다. 늘 있던 일이었다. 나는 군가는 물론 다양한 레퍼토리의 가요를 불렀다.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만 했던 다른 생도들로선 내가 많은 가요를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한 듯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따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한창 고조될 무렵, 인솔했던 훈육관이 우리가 있던 열차 칸으로 다가와 조용히 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러면서 “누가 떠들었나?”라며 생도들을 훑어봤다. 순간 생도들은 주눅이 들어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을 깨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제가 떠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인솔했던 훈육관은 두말없이 내 이름만 메모하였다. 나는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두 달간의 하계군사 훈련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9월 초 나는 당시 내 이름을 메모해 갔던 훈육관의 보고로 생도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것이다. 나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훈육관은 내가 속한 5중대 소속이 아닌 4중대 훈육관이었다. 나를 퇴교 조치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퇴교 당할 처지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였다.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만 보던, 육사 11기로 내가 속한 5중대 훈육관인 김기택 대위와 2중대 훈육관 안재석 대위가 반론을 제기했다.

“혼자 떠들지 않았을 텐데 혼자 책임진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이진삼 생도는 학교생활도 착실하고 모범적입니다. 군인으로서 이진삼 생도를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 점은 늘 옆에서 지켜본 저희가 보증합니다. 더구나 혼자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이 생도의 행동은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 일은 불문에 부쳐야 합니다.”

본보기로 나를 퇴교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4중대 훈육관과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겠다는 것은 오히려 훌륭한 행동이라며 맞서던 5중대 훈육관의 날 선 공방이 계속됐다. 판결은 위원장이었던 채영철 중령에게 넘어갔다. 모두의 눈과 귀가 그에게 쏠렸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열차 이동 중 오락회 한 것을 소란 피웠다고 하는데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말해봐”

4중대 훈육관이 우물쭈물하자 위원장 채영철 중령은 방망이 세 번을 내려치며 말했다.

“적발을 위한 지적인가? 됐어.”

채영철 중령의 한마디로 상황은 종결됐다.

변하지 않는 내 삶의 모토, 책임은 나에게! 후에 4중대 훈육관 K 대위는 “징계위원회 회부 건은 일벌백계 차원”이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기에 오히려 “죄송합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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