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마지막 수업은 없다
[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마지막 수업은 없다
  • 김래호 작가
  • 승인 2019.02.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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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기록하고 정의하는 데 몰두하는 사전辭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설이다. 한편으로는 사회가 그 자체의 소비를 위하여 창조해 놓은 것을 축적해 놓고서 사람들이 널리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가 축적해 놓은 것을 널리 유통시켜 오래된 말들이 페이지 위에서 죽지 않고 새로운 말들이 추운 곳에 버려지지 않도록 한다. - 알베르토 망겔(1948- ) 《서재를 떠나보내며》

지난 설 연휴에‘말모이’를 관람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집주라는 진지한 주제였지만 웃음과 함께 감동을 선사한 영화였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1940년대 경성역을 무대로 활개치는 소매치기 김판수(유해진)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을 만나 비밀리에 팔도의‘조선말’을 모으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신의 시나리오를 감독한 엄유나가 정작 전하는‘말’은 언어학자의 학설 이상이었다.

사실 까막눈이었던 판수는 아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문당책방 사환으로 취직한다. 구자영이 주인인 이 서점의 지하실에는 말모이 편집진이 은밀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판수는 자영에게 글을 배우면서 점차 글과 말의 소중함을 깨닫고 적극 참여하는데 그로 인해 가족들은 고통을 겪게 되고... 여기에서 영화의 웃픈 에피소드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을 깨친 판수는 더듬더듬 거리의 간판을 읽어나간다. 사과탕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열렸던 문이 닫히면서 사탕과자가 된다. 첫 월급을 타서 중학생 장남에게 안경을 선물했는데 일제 경찰서장은 아버지의 소재를 대라며 귀싸대기를 날려 안경을 박살내고, 권총으로 협박한다. 감방 동기생들에게 성냥개비로 기역, 니은, 디귿을 써 보이다가 이응에 이르러서는 마시던 소주잔을 턱 내려놓는다. 청중들이 엉덩이와 궁둥이를 구별하지 못하자 대표를 밀가루 뿌린 의자에 앉혔다 세우고 일갈한다.“조금 묻은 위가 엉덩이고, 많이 묻은 아래 쪽이 궁둥이여. 알아들 먹었지요!”

지혜와 지식은 입말과 글말에 견줄 수 있다. 말을 통한 지혜나 글을 매개로 하는 지식은 모두 언어활동으로 그 우월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영화의 명대사처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소중한 법”이기 때문에 사전을 만들기 위해 합심하고 표준말을 제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과제이다.

스위스의 작가 페터 빅셀(1935- )은 기존의 언어와 사유체계의 전복을 시도하는 글쓰기로 유명하다. “책상은 책상이다”는 그의 대표작으로 어떤 나이 많은 남자를 등장시켜 도대체 왜‘책상, 의자, 침대, 사전’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반문하고 혼자 바꾸어 부르기로 작정한다.

침대를 사진으로, 책상을 양탄자로, 의자는 시계로, 신문은 침대로, 거울은 의자로... 그는 바뀐 낱말로 꿈을 꾸게 되지만 결국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고, 타인들 역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 남자는 그때부터 말문을 닫고 침묵하기 시작한다. 웃기지만 슬픈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만 독자들은 사회적 공기인‘말’의 참된 인식을 얻게 된다.

낱말들에는 편견이 없다. 쓰임새가 전부인 것이다. 완벽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 언어의 미덕이다. 언어는 일어났던,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간 경험의 전체성을 낱말을 통해 껴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공간도 허락한다. 이런 면에서 언어야말로 잠재적으로 인간의 유일한 집인 동시에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 없는 유일한 주거지이다. - 존 버거(1926-2017)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말은 날아가지만 글은 남는다’는 라틴어 격언. 공중에서 흩어지는 말과 그 주체도 회두리에 죽지만 종이 위의 글은 불태우지 않는 한 영원하다. 분서갱유- 그렇게 온전하고 완벽한 단어들은 사전이나 책으로 모아져 누군가가 꺼내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뿐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글자를 찾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속내를 가장 적확하게 드러내는 음절과 글귀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산수유, 매화, 진달래, 벚꽃... 이제 우수 지나면 곧 남녘으로부터 화신이 전해질 것이다. 이 각양각색의 봄꽃들은 모두 독특한 존재들이지만 그것들의 배후 근저에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꽃’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소크라테스가 열정적으로 추구한 정의定意 문제에서 출발했다. 그의 탐구는 철저하게 감각적 사물의 비감각적 본질을 찾는 집요함이었다. 현실적 사물과 사상에 보편적이고 영원불변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이데아론은 공자의 정명론과 흡사하다. 겉모습은 모두 다르지만 ‘사람’이라는 본성과 본분에 충실한 사람다운 사람 바로 그것이다. 수시지의- 제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만 보지 말고, 그 ‘꽃’이 응축하고 있는 계절의 본질을 주시하라는 뜻이다.

한글사전은 한민족의 ‘정명과 이데아’의 보고이다. 일제가 집요하게 말모이 작업을 방해하고 겁박한 이유는 내선일체- 일본인들의 그것을 한민족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책동이었다. 영화 말모이는 135분으로 끝나지만 어제와 오늘, 내일도 우리말 사전편찬은 계속된다. 이제 결코 마지막 수업은 없으리라.

아멜 선생님은 프랑스 말에 대해 하나하나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프랑스 말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명확하고 가장 확실한 말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잘 간직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남의 노예 신세가 되더라도 자기 말과 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다. - 알퐁스 도데(1804-1897) ‘마지막 수업’

졸업과 입학에 한 학년씩 올라가는 2월. 웃음의 말모이- 눈물의 말모이- 자녀들 손잡고 이 영화를 관람하고, 감상문을 써 보고, 또한 대화 나누어 보시길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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