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직각보행(直角步行)

1955년 7~8월 무더위를 이겨내며 1학년 과정 기초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공들여 노력한 교육 중 하나는 직각보행이다. 군인은 모름지기 걸음걸이가 단정하고 늠름하고 절도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 무엇보다 직각보행을 강조했다.

운동장에 횟가루를 뿌려 정사각형을 커다랗게 그린 후, 그 위에 똑바로 서서 눈은 15도 위를 향하고, 턱은 자연스레 목에 붙이며, 팔은 곧게 뻗고, 주먹은 계란 한 개를 부드럽게 쥔 듯하고, 가슴은 당당하게 앞을 향하는 것이 직각보행의 자세다. 맨 처음 얼핏 봤을 때는 ‘그까짓 거 뭐 어려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직접 보행에 들어가서 자연스레 팔을 앞으로는 12인치 뒤로는 6인치를 흔들며 발과 다리를 곧게 편 채 앞으로 70cm를 내딛는다는 것은 예상 밖의 난제였다.

생도들은 ‘그까짓 거 뭐 어려워’ 하는 표정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자기가 어떻게 걷는지는 모른 채 다른 생도가 걷는 모습을 보고 웃어 대곤 했다. 로봇처럼 딱딱하게 걷는 생도, 엉덩이를 쭉 빼고 걷는 생도, 팔자로 걷는 생도, 가슴을 내밀고 걷는 생도, 턱을 흔들며 걷는 생도, 팔을 옆으로 흔들며 걷는 생도 등등. 그중 압권은 같은 쪽의 손과 발이 함께 나가는 생도들이었다.

그런 오합지졸의 걸음이 통일되어야만 모든 제식(制式) 동작은 일체감이 난다. 매일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을 연습한 결과 한 달여가 지나면서 겨우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다. 사관생도의 보행은 항상 직행 혹은 직각이다. 앞으로 직진하다가 모서리를 돌 때도 절도 있게 직각으로 돌아야 하고, 식사할 때의 숟가락질 또한 일직선으로 들고 직각으로 꺾어 입에 넣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외출을 하게 되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십상이었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을 수군거리며 신기해했다.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했고, 여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할라치면 목에 더 힘을 주고 직각보행을 했다. 이는 육사 생도,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하나의 표식(表式)이었다. 오합지졸의 제각각의 걸음걸이가 어느 순간 ‘너와 내’가 아닌 ‘우리’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군(軍)이라는 소속감이었다. 이후에 내가 제식 훈련을 통해 절도의 미(美)와 힘으로 단련하고 응원단장과 중대장 생도를 맡으며, 외부 학생 견학 인솔 등 다양한 활동을 학교 훈육관 지시에 따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학년 복종, 2학년 모범, 3학년 실천, 4학년 인격 도야라는 각 학년마다의 실천 목표를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충성의 의미

우리의 육사 교육은 미국 웨스트포인트의 프라이드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조국, 명예, 책임, 의무를 강조했다. 거기에 자사(子思)의 《중용》에서 비롯된 ‘지(智)·인(仁)·용(勇)’을 우리 육군사관학교 교훈으로 삼고, 인간이 수양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을 갖추도록 했다.

육사 교육 중 내 자신이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은 ‘충성’의 개념이었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유교 문화권에서 배웠던 한 개인에게 바치는 의미가 아닌, 국가에 바치는 것이 진정한 충성의 의미였던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의 강령(綱領)과 다섯 가지의 인륜(人倫)을 말한다.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의 삼강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의미한다.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하는 오륜은 《맹자》에 실린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의 다섯 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으며,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본래 삼강오륜은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다. 물론 지금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윤리 도덕이다.

이처럼 우리의 삼강오륜 교육은 개인이 개인에게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여, 충성의 의미 또한 개인이 개인에게 집중하는 교육으로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충성의 의미가 어느 개인에게 잘 보여서 마치 권력의 노예가 되는 꼴이었다. 미리 알아서 긴다거나 아부 등의 도구로 전락되었다.

이 말은 내가 대전중학교 다닐 때의 한상봉 교장선생님이 조회 때마다 하신 말씀과 부합된다.

“이 세상은 없어야 할 사람이 있고,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있고,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있다. 우리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다.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기 위해서, 황금이나 권력이 아닌 국가에 충성하려는 생사의 가치관, 필사즉생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

 

군인답다

4학년이 되면서 5중대장생도 명을 받았다. 훈육관들은 내게 특과가 아닌 보병장교로 임관할 것을 권유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6·25전쟁을 겪은 생도대장 최주종 장군은 나의 생도 생활을 지켜보고는 “중대장, 대대장 하면 잘할 거야.”라고 치켜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정신 자세와 품성 그리고 실력 배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장군의 꿈을 꾼 건 아니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를 만큼 급박했다. 기껏해야 대위(중대장) 혹은 중령(대대장)까진 할 수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5년 후에 중대장 아니면 10년 후에 대대장으로 전쟁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실력은 230명 중 159등으로 육사를 입학한 4년 후 176명 임관자 중 서열 120등으로 졸업하였다.

나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나 훈육관들로부터 ‘지휘관 하면 잘할 것이다.’라는 말은 자주 들었다. 더욱 군인답기 위한 나의 노력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이 누구나 공평하게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본이라면, 나는 그 유일한 자본을 임무수행과 군인답기 위한 노력에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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